방법은 어렵고도 간단하다.
한동안 드라마만 보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봤던 드라마를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평소에 드라마를 즐겨봤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랬다. 퇴근 후의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기대하며 하루를 버텼던 것처럼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건 드라마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무기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소파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서 드라마 속으로 도망쳤다. 주로 노희경, 김수현 작가의 예전 작품들을 보면서 과거에 느꼈던 감정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지켜봤고 어떤 경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겪을지도 모를 일에 대처하는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고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소파엔 엉덩이 두 쪽이 흉측하게 남아서 언제나 손으로 그 흔적을 쓱 지웠다.
우리와 같이 선함과 악함이 뒤엉킨 불가해한 캐릭터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을 만나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혼자서 끙끙 앓았던 감정들이 단박에 해소되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드라마 시청은 나같이 인간관계가 좁고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엉덩이 자국을, 몇 시간 동안 TV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
마음 한편에는 지금 상황에 드라마나 보고 자빠져 있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내가 있다. 내가 자기 정당화와 자기 방어를 습관적으로 하는 인간임을 알아서 나의 모든 생각은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한 변명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집 안에 있는 게 좋지만,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느냐고. 배우고 싶은 것이 없지만 뭐라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까 아무 일이나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그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드라마를 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정말 내가 피곤하다.
뚜렷한 자기 확신이 없어서 거의 모든 행동에 죄책감이 깔린다. 언제나 ‘이게 좋지만 저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못하는 나는 잘못된 인간이 아닐까.’의 언저리를 맴돌고, 내가 생각한 잘못된 인간이 되기 싫어서, 비난받기 싫어서 자기 정당화와 자기 방어를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연결고리를 끊고 싶었다. 방법은 정말로 간단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들이지 않는 남들을 탓했으면서 정작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모습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싫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어떻게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쓴 이 모든 행위의 근간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도 그 사실을 망각했다.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아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 속에 갇혀 있었다. 정작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고 싶은데 못하면 그것이 나의 한계임을 인정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면 된다. 그 단순한 일을 왜 이렇게까지 어렵게 끌고 살아왔는지. 좀 편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