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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Dec 05. 2023

세상에 이런 일이

술도 날 거부하네

유입 키워드에 막걸리 중독이 있어서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서 막걸리를 끊은 건 아니고 요즘은 추워서 막걸리를 마실 수가 없으므로 경주 법주를 따끈하게 데워 마시게 되었다. 동네 슈퍼에선 보통 백화수복 옆에 나란히 놓여있고 700ml짜리만 파는 경우가 많다. 700ml를 샀다가 4일 동안 한 잔씩 나눠 마시게 돼서 대형 마트로 200ml 원컵을 사러 갔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4일 연속 술을 마시는 건 몸에 무리가 간다. 근래에 늙었다고 꽤 징징거렸는데 또 징징거리게 되네. 그래도 주말의 술 한잔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 지금부터 굉장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경주 법주 200ml 2개와 치즈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눈을 위로 치켜뜬 직원이 마스크를 내려 보라고 했다. 마스크를 꼈던 이래로 몇 번 있었던 일이라 나는 마스크를 내렸다. 보통 이런 경우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은 아.. 짧은 탄식이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는 재빨리 계산을 해주었었다. 그런데 이분은 다시 한번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엉겁결에 스스로 모자까지 벗어서 들어 보였다.      


그녀는 확신이 섰다는 듯,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니, 마트에 오는데 무슨 신분증? 이런 일은 난생처음 겪어보았다. 중학생일 때도 새댁이라는 호칭을 듣고 신입생 때 조교인 줄 알고 매번 동급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받아온 터라 나는 무척 허둥댔다.    

  

신분증 같은 건 없지만 내가 40이 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자세히 보라고 그분에게 들이밀어 보았다. ‘보았지요? 40이 넘은 거 맞지요?’의 심정으로. 그러나 그녀는 더 단호해진 표정으로 도리도리 고개까지 흔들며 나의 경주 법주 2개를 계산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져다 놓았다.  

    

당황스럽고 창피스럽기도 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정말로 내가 미성년자로 보이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자신의 눈에는 그리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모자를 내리고 마스크를 다시 쓰고 결국 치즈 하나만 들고 마트를 나와야 했다.      


아씨 뭐야 이거 자랑질이냐고 화내지 말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나는 진심으로 기분이 몹시 나빴기 때문이다. 따끈한 경주 법주를 마시지 못하게 된 것과 내가 40이 넘어도 어리숙해 보이는 인간으로 비춰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새빨개진 나를 보고 몰래 술을 사려다 실패한 사람이 분명 하단 확신을 가졌으리라. 나는 왜 이까짓 일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일까. 그러니까 나이 40이 넘어가도록 말이다. 자신감이라고는 없는 나는 더 쪼그라들어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버린 것만 같았다. 화가 났다. 백수 생활 2년 동안 집안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그동안 겨우겨우 습득해서 쌓아 올렸던 사회성이라는 것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린 건가. 이제 어딜 가도 나는 백수 티가 나는구나. 내 생각은 비약적으로 치달았다.      


결국, 동네 슈퍼에서 화랑 1병을 사 들고 와서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봤다. 혹시 그 잠깐 사이 정말로 내가 미성년자의 얼굴로 변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기대감을 품고 바라본 거울 속에는 웬 중년 여자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다 살다 마트에서 거부당하다니. 아니, 역시 인생은 살아봄 직한 것인가. 그동안 내가 하도 나이 들었다고 서글프다고 징징거린 탓에 이거나 먹어라! 이렇게 큰 거 한방 주시는 건가. 그래도 이왕이면 좀 납득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건가. 40이 넘어서 미성년자로 오해받다니. 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거 절대 자랑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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