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Nov 14. 2023

붕어빵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렇게 붕어빵 4마리로 행복해도 되는 건가.

주머니에 지폐 한 장 품고 다녀야 할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 초에 붕어빵 2천 원 치 달라고 했다가 붕어 2마리를 건네받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붕어빵을 끊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다. 하지만 다행히도 산으로 가는 산책길에서 붕어빵 2마리에 천 원인 가게를 발견했다. 야호.  

   

따끈한 현찰을 뽑아서 산으로 향했다. 연녹색, 노란색, 귤색, 새 빨간색, 검붉은 색 단풍잎을 손에 들고 살랑거리며 룰루랄라 붕어빵 가게로 향했다. 붕어빵 할머니가 족히 여든은 넘어 보였기에 큰 소리로 팥으로 2천 원 치 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할머니는 앞서 슈크림 붕어빵 주문을 받았던 모양으로 누구는 슈크림 달라, 누구는 팥으로 달라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나는 천천히 만드시라고 일러두었다. 2시간 전에 ATM기 앞에서 카드를 넣었는데 돈이 나오지 않는다고 도움을 요청한 할아버지를 만난 탓이다.     

 

나는 기계에 카드가 없는 걸 확인하고 할아버지께 지갑을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역시나 그의 지갑에서 카드가 발견되었다. 현금 30만 원을 출금하는 걸 도와드리며 노인의 인지 능력에 좀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 붕어빵 굽는 일 또한 얼마나 만만치 않을 것인가.      


얌전히 붕어빵을 기다리는 사이 할머니 친구가 손녀딸을 위해 슈크림 붕어빵을 사러 왔고, 강아지를 안은 여자가 팥 붕어빵 천 원 치를 주문했다. 할머니의 친구는 슈크림 붕어빵을 담으면서 강아지를 안은 여자에게 여기 저 아저씨가 먼저 왔으니 좀 기다리라고 했다.  

    

어? 그 아저씨는 혹시 나?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지만 이렇게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심지어 마스크도 쓰지 않았는데. 역시, 나는 남상인가.     


나는 당황하면 크게 웃는 버릇이 있다. ‘하하하하하 저 여자입니다. 저 여자예요’를 외치기에 이른다. 할머니는 그제야 나를 요리조리 뜯어보더니. 모자를 쓰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셨다. 할매. 너무해. 미워.    

  

그때 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저 아줌마한테 잔돈이나 건네주라고. 어? 그 아줌마도 혹시 나?  


지금껏 20대 초반에 운전하다가 택시 기사로부터 어이, 아줌마!라는 말을 들은 것 빼고 첨 듣는 아줌마였다. 할머니들은 그래도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 주었는데, 심지어 아줌마들도 내가 같은 아줌마인 걸 알지만 나를 뭐라고 부를지 망설이는 눈치였는데. 할매. 너무해. 미워.     


종종 자신을 아줌마라고 칭하지만, ‘나의 아줌마’는 자신을 진정한 아줌마로 생각하지 않는 관용의 의미이고 기꺼이 자신을 아줌마라고 칭할 수 있는 쿨함을 드러내기 위한 아줌마다. 하지만 ‘할머니의 아줌마’는 ‘택시 아저씨의 아줌마’처럼 비하의 의도를 품은 아줌마도 아닌, 그냥 아줌마라서 부른 아줌마인 거다.      


뜨끈한 붕어빵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꼬리부터 야금야금 4마리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맛있었다. 할매를 용서해 주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번에 아주 쌔끈하게 차려입고 적어도 새댁이라는 호칭을 듣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정신분석 입문/꿈의 해석’에 산책길에 주워온 낙엽을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뭔가 야한 내용이 있을 것 같아서 샀지만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이 책의 용도는 이렇게 사용되었다.      


도대체 나란 인간은 뭔가. 요즘 나는 이런 상황, 그러니까 남편과 8개월째 단 한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행복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건 그동안 필사적으로 내가 바라고 노력했던 일인데도 그렇다. 내가 지금 이렇게 붕어빵 4마리로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붕어빵 4마리로 행복해지는 인간인 것을. 조그만 일에 행복을 느끼고 조그만 일에 상처받는다. 이것은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고 그래서 살 수 있고 그래서 괴롭다.

     

오늘같이 온종일 기분이 좋으면 다음 날은 어김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알기에 나는 냉큼 안전장치를 준비한다. 그래 낼 아침에는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그러면 내일을 그럭저럭 즐겁게 맞이할 수 있다. 아줌마는 요즘 살이 올라 통통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너는 이상한 결정을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