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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09. 2024

나는 인도 태생입니다.

길 위의 인도고무나무를 보며

K는 겨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게 출입구에서 1M쯤 떨어진 곳에 세워 놓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몰아치는 낯선 감각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차가운 공기에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을 땐 모두가 자취를 감춘 스산한 밤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차가운 공기는 보란 듯이 다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이곳으로 나왔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짙푸른 바다 빛의 밤하늘은 다시 모든 것의 형체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했다. 나는 그것이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칠흑 같은 어둠이 다정했다. 새벽의 공기를 짊어 든 이들은 어딘가에서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나타나 어딘가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찌르는 고통이 증폭되는 것을 느끼며 같은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내가 이곳에 서 있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K는 커다란 김장용 비닐 몇 장을 가지고 가게 문밖으로 나왔다. K는 양 손바닥으로 비닐 입구를 신경질적으로 비벼서 활짝 열어재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벌어진 비닐의 입구로 나의 머리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비닐은 나의 발목에 케이블 타이로 단단히 고정되었다. 나의 머리와 팔과 다리와 몸통은 몇 장의 김장 비닐과 몇 개의 케이블 타이로 꼼꼼하고 빈틈없이 감싸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를 고통 속에 처넣었던 칼날 같은 겨울바람에게 애원했다. 이 비닐을 뚫어 달라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이 케이블 타이를 끊어달라고. 나의 소리는 비닐 안에서 광광 울려 내게 되돌아올 뿐 아무도 김장 비닐과 케이블 타이로 칭칭 감긴 나를 보지 못했다.      


나의 들숨과 날숨으로 생긴 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비닐 표면에 달린 물방울들은 빗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닐은 안개를 집어삼킨 것처럼 뿌옇게 짙어져 멀리서 보면 솜뭉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날카롭던 감각들이 서서히 뭉개져 가는 동안에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K가 커터칼을 들고 나왔다. K는 안개와 물방울로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커터칼로 김장 비닐 곳곳에 마구잡이로 구멍을 냈다. 방금까지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나는 서슬 퍼런 칼날이 몸 언저리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움찔거렸다.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편안히 숨 쉴 수도 없는 애매한 지옥의 나날이 흘렀다. 이 가게에 온 뒤로 내가 자리 잡고 서 있었던 카운터 옆자리의 나날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몸을 찔러댔던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몽롱하게 숨 막히는 안개를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서 있게 된 이유는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서 있을 뿐이다. 서 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으므로 여전히 끈덕지게 붙어있는 물방울들과 흘러내리는 물방울의 덩어리와 희뿌연 안개를 피해 거리를 오가며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리고 입술을 굳게 다문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손에 이끌려 걷고 있는 개들과 때로는 그들을 이끄는 개들과 잡초더미와 자동차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들과 땅 아래와 위를 들락거리는 시궁쥐들과 못 가는 곳이 없는 바퀴벌레들과 언제나 날카롭게 울어대는 직박구리들을.      


나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지켜본다. 기억이 난다. 여자는 입술을 굳게 다문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시선이 내 몸 곳곳을 훑는다. 이내 두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허탈한 한 줌의 숨이 삐져나온다.    

  

그녀의 숨이 분명 내게 와닿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죽었구나. 그리고 다시 K에 대해 생각했다. K는 나를 살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죽이고 싶었던 걸까. K가 나를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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