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
앞으로 내 인생에 리모델링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욕실 거울이 타일 밖으로 5mm 튀어나온 걸 무던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거나.
공용 욕실 타일 작업이 끝나고 안방 욕실 작업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그레이 줄눈이 타일에 스며드는 하자가 발생해서 타일을 다 뜯어내고 새 타일을 골라 재작업을 했다. 문제는 분명히 화이트임을 확인했던 타일이 욕실 조명을 비추자 명.백.한. 밝은 그레이로 돌변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타일은 조명이 비추는 정도에 따라 그레이로 보이기도 하고 화이트로 보이기도 해서 바닥은 화이트로 보인다. 벽과 바닥 전체를 화이트 타일로 하고 싶어서 자기질 타일을 굳이 굳이 벽에 사용했는데 이로써 그간의 계획과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밝은 그레이 벽과 화이트 바닥의 욕실 2개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욕실 거울이 타일 밖으로 0.5cm 튀어나온.
본인의 두 눈으로 타일이 화이트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누구도 조명을 비춰볼 생각을 못했을 뿐. (여러분 욕실 타일을 고를 땐 욕실 조명을 비춰보고 결정하시기를. 저는 다시 타일이 화이트로 보일 수 있는 전구를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리모델링을 하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줄줄이 발생한다.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리모델링의 진짜 어려움은 본인이 이상한 사람이 돼버리는 것에 있다.
예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유행에 편승하려는 습성과 그것을 빌미로 손에 익지 않은 작업을 해주지 않으려는 근성이 있다. 그러니까 모두가 손잡이 없는 싱크대를 쓰기 때문에 손잡이 있는 싱크대를 하겠다고 하면 굉장히 별난 사람이 된다. 손잡이 10개를 들고 시공하시는 분께 보여드렸을 때 내가 들었던 말은
-이게 뭐꼬? 뵈기 싫쿠로.(=도대체 이 손잡이는 뭐냐? 시공하기 싫다.)
-하하하 전 예쁜데요, 제 취향입니다.
-... 참나, 우째 달껀데요?(=..끝까지 손잡이 달겠다는 거네. 그래서 어느 위치에 달 건데?)
-가로는 20mm 세로는 12mm 정도 띄워서 손잡이는 이렇게 세로로 달아 주시면 됩니다.
-아이고, 내랑 같은 종씨라서 달아 주지 아니면 안 빼준다마.(=봐라. 나는 이렇게 유머 감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량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오~ 같은 성이시구나. 하하 아이고 고마워요. 잘 부탁드릴게요(=아저씨 성씨는 관심 없고요. 제발 제가 말한 위치대로만 달아주세요.)
거의 모든 공정이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별나고 까다로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생고생을 해서 작업해 주는 것이니 고마운 줄 알거라.’라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나는 순간순간 빡쳐 나오는 감정을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웃는 낯을 연기하고 있다.
내 돈 주고 내 취향으로 내 집을 고치겠다는데 도대체 왜 부탁을 해야 하는 건지 지금도 완전히 납득할 순 없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지불하고 진행하는 일이라 해도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모든 일을 내 뜻대로만 진행하겠다는 건 애초에 욕심일지도 모른다. 말했지 않은가. 이것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 같다고.
아저씨는 처음부터 손잡이를 달아줄 생각이었을 거다. 다만, 너 때문에 귀찮게 되었다는 말은 표현해야겠다 싶고 본인 나름대로 유머러스하게 말한다는 게 저런 말투였으리라. 그는 나중에 손잡이 규격 자체의 문제로 1mm 오차가 나는 것도 혹시나 내가 컴플레인을 걸까 봐 미리 일러주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무더워 속에서 에어컨 하나 없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는 아저씨들을 보면 평소 아저씨들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나조차도 같은 인간으로서 안쓰러워 보이긴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또 빡쳤다. 이 과정이 무한반복되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물론,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친구 P는 타일의 줄눈이라는 존재 자체를 내가 언급한 순간에 알아차렸고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했으니 누군가에겐 리모델링이 아주 가뿐한 것이 될 수도 있겠지. 역시 리모델링은 인생의 축소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