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 모든 것인 삶이 주어졌으니까
술을 끊어야겠다는 다짐도 없이 7개월째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로 술을 꾸준히 즐긴 나에게 생긴 기이한 현상인데 아마도 생존 본능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몇 년 사이 술을 버텨낼 재간이 없을 만큼 몸이 약해졌을 뿐 아니라 술이 선사하는 감정의 풍요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이다. 술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일 때 마셔야 한다.
무너져 내린 채로 술을 마시고 담배까지 시도한 적도 있지만 나를 붙잡아 준 건 하루 세끼의 밥, 산책, 독서, 글쓰기, 법문, 음악 같은 무해한 것들이었다. 이런 것들로 살아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결국 나를 버티게 했다.
인생에서 술이 사라졌다. 술의 쾌락 대신에 건강한 육체를 바란다. 위급상황을 대비해 언제든 운전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세팅해 놓는 것이 중요해졌고 무력감에 깊게 빠지지 않고 노동을 버텨낼 단단한 육체가 절실해졌다.
비실대는 몸뚱이를 깡으로 버텨냈던 시절은 끝이 났고 근력운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이혼하고 이사하고 리모델링하고 입주 청소 마치면 헬스를 시작할 거라고 나불댔던 주둥이가 드디어 책임을 질 때가 온 거다. 나 어떡해...
우선 많이 먹고 있다. 지금 상태로는 들어 올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살을 좀 찌우려고 노력 중인데 왜 안 찌는 걸까. 예전엔 먹으면 금세 쪘는데. 그토록 바랬던 일은 왜 바라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건지. 너무 더워서 모기가 없네 우헤헤 좋다고 했다가 몇 분 뒤에 모기에 시달리게 되는 것 같은 게 인생이라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믿었다. 지금은 간절히 바라는 일이란 본인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고 내게는 그 노력의 시작이 굉장히 어렵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때 흔히 쓰는 말이 있다. 그렇다. 9월부터 헬스를 시작할 생각이다. 9월에 헬스를 시작하고 일자리를 찾아보고 뭐라도 배울 생각이다. 이렇게 만천하에 알리는 건 그래야 한 가지라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고 겁나는 마음을 희석하기 위함이다.
겁이 난다. 퇴사도 하고 이혼도 했는데,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허세를 부렸지만, 겁이 나는 일은 언제나 들끓는다. 이사 온 동네 산책을 딱 한 번 나갔는데 그 낯섦이 우울함으로 내리 꽂히는 바람에 겁이 나서 두 번째 산책을 미루고 있을 정도의 겁쟁이가 나다.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언제까지 무섭다고 징징거릴 수 없으니까. 그동안 분에 넘치게 쉬었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몸이 아파서 죽거나 굶어 죽게 될 테니까. 원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인간으로 태어나 축복인지 재앙인지 모를, 어쩌면 그 모든 것인 삶이 주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