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5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퇴사하다.
17년 5개월의 근무 기간을 마치고 퇴사했다. 6362일 동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업무를 반복하며 20대와 30대를 보냈다. 젊은 시절의 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이곳을 떠나는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지 2004의 나는 몰랐다.
납득되지 않는 일을 당할 때마다 참고 견디고 그 시기를 넘기면 스스로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담아두고 있었던 거였다. 그것들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더는 숨쉬기 힘들어질 때쯤 알았다. 이러다 죽겠구나.
흔히 패션 회사라고 하면 트렌드를 반영하거나 제안하기 때문에 빠른 시스템과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구성원들이 있을 거라 추측하지만 이곳은 32년 전 의류공장이 모태로 창립멤버인 80대의 회장, 70대의 부회장과 사장, 50대의 전무와 이사, 50이 다 돼가는 선배 디자이너들과 회장의 두 아들이 있다. 여전히 30년 전의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 보수적이고 독특한 패션 회사다.
그들을 위한 보고를 위한 회의, 그 회의를 위한 회의가 연달아 일어나는데 정작 보고 후 결론 나는 일은 없다. 보고를 했다는 것, 다 같이 공유됐다는 것이 오로지 이 보고의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그 보고를 통해 또 다른 회의들이 우수수 잡힌다.
직원들은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보고에 떠밀린 업무를 쳐내야만 하는 사람과 보고를 통해 임원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사람으로. 난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지만 후자가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내 경험으론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 중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드물었다. 자신의 업무 실력으로는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든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라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솔직히 그 노력이면 일을 더 배우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지만)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고에 사활을 걸지만, PPT의 오타는 기본이다. 여기서 오타는 키보드 자판을 잘못 눌러 생긴 오타가 아니라 진짜 맞춤법을 몰라서 생기는 오타 거나 개념을 모를 때 쓰는 오타다. 실생활에서도 이런 오타 행진은 이어지는데 맹장 수술을 내장 수술이라고 한다거나 일본에서 '와따시와 조센싱 데쓰'라고 말해서 모두를 소스라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래 이천똥이 견딜 수가 없었다.
두서없이 조잡한 PPT의 내용과 어이없는 오타, 스피치 학원이 시급해 보이는 발표력 모두. 소리 지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나 임원들은 어이없는 오타에는 웃음을, 흥분해서 앞, 뒤 안 맞는 말을 제멋대로 뱉어내는 것은 열정으로 인정해줬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능력자가 된 것처럼 행동했다. 협력업체들을 향한 갑질을 권리처럼 누렸고 거슬리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누구든 붙잡고 욕하고 이간질하게 해서 본인의 정당함을 어필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왜 회사는 그 사람의 능력만 인정해 주는 것인가?'였다. 이천똥이 인정받는다면 그가 업무시간에 주식과 부동산에 빠져있을 때 미친 듯이 일하는 직원들도 인정해 줬어야 했다. 온종일 자리를 비우고 퇴근 시간이 돼서야 업무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종일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근무시간 내에 밀도 있게 일하는 직원들이 성실하다고 말해줬어야 했다.
'처세술이 곧 능력'이라는 생각이 당연시되는 게 옳은가? 직원이 아니라 머슴 노릇 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업무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이 상황이 맞냐는 말이다.
이천똥이 일로 얼마나 무능한지 얼마나 배워먹지 못한 무식한 에티튜드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임원들이 있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곁에 두고 치켜세워주는 임원들도 있다. 그 핵심 인물이 바로 우리 부서 수장이었다.
그녀와 그의 본질적 DNA는 동일했으므로 그녀는 그가 자신의 머슴이 될 인재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에게 끊임없는 기회와 분에 넘치는 권한을 줘서 다른 직원들로 하여금 저래야 살아남는구나를 확실하게 인지시켰다.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일을 본인이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어필하는 것과 머슴 같은 직원들의 추종을 받으며 여왕 같은 대접을 받는 일이 중요했다.
일 잘하는 직원들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보상이나 권한도 부여받지 못 한 체 일에 혹사당했다. 일로 흠잡을 것이 없으면 성격, 외모, 스펙, 부모의 학력과 재력까지 끄집어내 험담이 아니라 팩트라는 뉘앙스로 떠들어댔다. 그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겨주고 그들이 위로 올라갈 길을 차단했다.
본인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쓸만한 직원들은 다 쳐내고 멍청한 것들만이 권한을 가진 회사가 되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와 같은 행동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 방법을 선택했다.
더 이상 그녀도 '누군가에 엄마이고 아내고 딸이다'라는 생각 따위까지 해가며 애쓰기가 싫었고 그녀는 조직개편을 핑계 삼아 눈엣가시인 날 그 새끼 밑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