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다.

나는 개복치였다.

by 윤비

동등한 입장에서 일을 하다 이천똥의 팀원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그 업무를 가장 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 그럼 업무를 못했다면 그 새끼 밑으로 안 가는 거였나? 업무를 잘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라고? 이런 개소리를 할 거면 차라리 짖던가.


여태껏 회사생활의 고충을 딱 한번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새끼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했는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는데 보란 듯이 같은 직급인 그를 팀장으로 앉혔다. 그리고는 사람들이게 이번 조직개편으로 신 과장이 제일 걱정이 된다는 착한 상사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는데 정작 나한테는 한 번도 그 말을 한 적이 없다. 난 안다. 그녀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했으리라는 것을.


올해 5월에 조직개편이 단행되었고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면 최대한 감정을 배제시켜야만 했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먹고살려고 회사를 다녔다. 결혼(휴 다행인지 불행인지)이라는 걸 하고 집과 차를 샀고 모든 대출금을 완납했다. 계좌엔 몇 년간 돈 벌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비가 있다. 돈 버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인 17년 5개월의 시간 덕분에 먹고살만해졌단 이야기다. 20,30대를 그렇게 지내고 보니 더 이상 돈이 목표인 인생을 살기 싫었다. 남편의 아버지처럼 평생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삶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지 자신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에 미련은 없는가? 온종일 앉아 1초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곳은 마이크로 매니징이 난무해서 20년 경력의 선배 디자이너들의 결정 권한 조차 많지 않다. 무거운 조직이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 때문에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연차에 맞게 일의 영역이 확장되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서 후퇴되는 것만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데 앞서 말했지만 아무리 일을 잘한 들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한다. 그렇게 나처럼 더는 보상받는 것도 바라지 않게 된다. 이곳에선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조직생활의 소속감이 사라진 후의 사회적 고립감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껏 조직에 소속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불안감이 주는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는 건 사실이다. 지금은 당장 싫은 사람들을 하루 종일 보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이 더 간절하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직은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궁극적인 인생 목표는 한결같았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하지만 회사를 다닐수록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더 최악이었고 내일은 더 최악의 인간이 될 것만 같았다. 점점 그들과 비슷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부끄럽고 무서웠다.


불합리한 상황에 순응하지도 뚫고 나가지고 못했다. 한 거라고는 앉아서 그들을 끊임없이 씹어대는 거였다. 그럴수록 화가 풀리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 응어리들이 남아서 매일매일이 분노스러웠다. 나는 그 분노를 매번 곱씹으며 날 갉아먹게 내버려 뒀다.


분노가 가라앉으면 어김없이 자책이 따라왔다. 끝없는 분노와 자책의 도돌이표를 겪고 난 지금에야 내가 보인다. 난 바닷가재로 가득 찬 수조 속의 개복치였던 거다. 그들을 경멸하면서도 비슷한 껍데기를 둘러매고 더 괜찮은 인간이라 자위하며 이곳을 감히 벗어날 생각조차 못한 수조 속의 개복치. 태생이 예민한 나를 그들과 같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판단하면서 스스로 괴롭히는 멍청한 짓을 했다. 내가 바닷가재를 극복할 능력은 없다는 걸 담백하게 인정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바닷가재가 없는 세상으로 나가면 된다.


그렇게 퇴사를 결심했다.



이전 06화2004.04.01~2021.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