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말하다.

D-DAY 어플을 깔고 4개월을 기다리다.

by 윤비

4월부터 고민하며 5월이 끝나갈 즈음 퇴사를 결심했지만 친한 동기들에게 조차 이 결심을 말하진 않았다. 그동안 이 가벼운 주둥이로 얼마나 많은 퇴사 선언을 했던가!


나불거리는 맛으로 살았던 내가 진짜 퇴사를 결심하니 입이 꾹 다물어졌다. 혹여나 그들로 인해 내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가족, 남편, 친구, 회사 동료, 주변인 등등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처음 퇴사 결심을 주삐리에게 통보했을 때 그는 18년이면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둬도 된다며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주둥이 퇴직자 남편으로써 반응(매번 펄쩍 뛰며 필사적으로 반대함)을 예상했는데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진상 짓을 좀 하긴 했다. 평소대로라면 회사 욕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속사포로 떠들어댔는데 퇴사 고민을 하면서부터는 주삐리가 물어봐도 한숨만 푹푹 쉬고 술만 퍼마시다가 베란다에 숨어서 울다 들키는 생활을 꽤 했던 것이다.


그 후 주삐리는 불쑥불쑥 솟구쳐 오르는 가장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거들먹거리긴 했지만 웃으며 받아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퇴사를 결심하면 속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17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곳에서의 삶이 익숙해져 있어서 마치 회사와 이혼하는 듯했다. 역시 이혼은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아서 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슬펐다.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는 나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그러다 그들에게 결국 졌다는 패배감이 몰려올 때면 분노했다가 왜 더 현명하게 쏘아주질 못했는지 자책하다가 다시는 그들을 못 본다 생각하니 기뻐서 행복감에 날뛰다가 퇴사 후의 자유로움을 상상하며 설렘이 극도에 치달으면 또 그렇게 슬퍼졌다. 이 다이나믹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퇴사일에도 멈추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드라이하게 집에서는 반 미친년의 이중생활을 보내며 7월 27일 화요일 드디어 회사에 퇴사 의사를 통보했다. 퇴사를 결심한 순간부터 D-DAY 어플을 깔아 매일 퇴사 통보일을 카운트 다운하는 지질한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주삐리의 응원을 받으며 출근했다.


퇴사일을 8월 31일로 정한 것은 22S/S 기획을 마무리하고 보고까지 얼추 마무리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던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절차를 무시할 수 없어 이천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상담실로 우물쭈물 내려오는 그의 표정은 '아 또 나한테 뭘 따지려는 건가'싶은 표정이었는데 내가 생글거리며 8월 31일까지 근무하고 그만두겠다고 하니 몸을 움찔거렸다.


긴 말 섞고 싶지 않았다. 팩트만 전달하기로 맘먹었다. 혹시 자기 때문이냐고 묻는 그에게 쉬고 싶다고 말했다. 돈도 벌만큼 벌었고 같은 일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이 회사의 미래는 없다고 개인의 성장을 고려했을 때 지금에라도 나가야 되겠다고.


이천똥은 내 퇴사 이유보다는 지금까지의 고달픔을 말하며 여느 때처럼 그 정당함을 어필하며 애썼다. 본인은 누군가를 불행하게 할 의도가 없는 사람이고 오직 잘해보고자 열심히 일했다고. 나는 피식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내가 너 때문에 사람 하나 보고 퇴사 결정할 연차는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갑자기 그의 고민상담으로 변질된 퇴사 면담을 끝내고 이사에게 보고할 때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로써 모든 게 끝이 났다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퇴사 소식을 접한 이사는 내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고 늦은 회의를 끝마치고 퇴근하려는 나의 동기를 불러다가 내가 다른 일을 계획하는지에 대해 캐물어봤다.


덕분에 아무것도 몰랐던 동기는 충격으로 밤새 잠 못 이뤘다 한다. 그녀와 나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를 몸소 실현할 수 있는 사이로 그녀가 없었다면 17년 5개월이란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퇴사 소식이라도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 조차도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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