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인간이 더 최악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다.
백억진은 왜 퇴사하느냐고 묻는 대신 언제부터 퇴사 결심을 했는지를 물었다. 왜 퇴사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바뀐 팀장 밑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해서 다닐만하다고 생각한 순간 확신했다 말했다.
이천똥은 업무 프로세스를 모르기 때문에 내 업무에 관여하거나 지시하지 못했다. 심지어 결재할 권한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일은 결재할 수 없었는데 막 농사일을 배우는 풋내기가 17년 경력의 농사꾼에게 파종시기와 거름의 종류를 결정해주는 꼴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서장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원칙은 팀장 전결이었지만 내 결재만으로 업무가 진행되었다.
지시한 거라고는 보고 자료 몇 장이었는데 내 PPT가 그의 손을 거쳐 조잡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우스우면서도 끔찍했다. 심지어 본인이 만든 PPT 조차 어떻게 브리핑해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드라마 대본 쓰듯 읊어줬고 그는 본인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발표했다.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몇 시간씩 일하는 당연한 모습을 보면서도 놀라워했고 스케줄대로 업무를 쳐내려고 했을 뿐인데 업무적 압박감을 받았다며 그런 적이 첨이라 당황스럽다 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이 그에겐 특이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러모로 유능한 팀장임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입사 3년 차 직원의 입에서도 많이 모자란 것 같다는 탄식을 나오게 하는 사람이 말이다.
이사가 내게 연락은 한건 퇴사 통보일로부터 1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바로 면담을 하리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하루에 5~6개나 되는 보고 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메신저로 면담은 좀 있다 하자는 멘트를 못 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한다. 첨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거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그녀는 조직개편 전부터 내 퇴사를 짐작했기 때문에 놀라울 것 없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퇴사를 생각해보았는데(어찌나 그 새끼와 똑같은지) 본인은 여전히 일이 재밌고 보람돼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어찌 됐든 내 결정을 존중하며(널 붙잡을 생각은 없고) 이제 나이 많은 직원들이 순차적으로 나가줘야 조직도 젊어지지 않겠냐 했다. 응?? 그럼 너는? 60이 다 돼가는 네가 40살인 내게 늙었다고 하는 거냐 지금.
마지막으로 바뀐 팀장이 어떠냐 물어왔다. 전의 팀장과 비교하자면 모든 포커스가 일보다는 보고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그건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고 말했다.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임원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에 보고에 사활을 거는 건 당연해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투였다. 그건 남, 여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차이 아니던가?
오히려 그녀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예전 팀장을 욕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 하는 것치곤 회사에서 인지도가 없지 않냐고. 도대체 이곳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날 그토록 싫어하면서 한번 흘리듯 말한 내 남편의 직장을 기억하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는 그녀를 보면서 역시 내게 자격지심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항상 남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고 퍼트리기를 좋아했는데 본인 삶이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그런 짓을 안 하지 않나?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러울수록 남의 삶과 불행을 들춰내려고 한다. 그녀는 내가 불행해지기를 바란 건지도 모른다.
면담이 끝나고 그녀가 준 나의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보았다. 지금보다 훨씬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꾹꾹 담아 적은 내용은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위로가 됐다.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의 결정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판단하고 일단 결정을 내리면 후회를 남기지 않게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