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선언하면 보이는 것

퇴사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by 윤비

동기들에게 퇴사를 알렸을 때 백억진은 또 울컥했다. 진짜냐고 몇 번을 되묻고 멍하게 있다 찔끔찔끔 눈물을 훔쳤던 이깐죽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끙끙거렸을 내가 보였다 했다. 모두가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김지지는 본인 주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웠지만 모두가 내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법이란 없는 거였다. 참다못한 백억진이 지금은 내 이야기를 듣자고 할 때까지 김지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섭섭했다. 나와의 친밀도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인데 모두에게서 같은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퇴사가 내겐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남들에게도 큰 의미 일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타고난 응석받이 기질은 이렇게 은연중에 나타나는 법이다. 그렇게 응석받이는 김지지한테 한대 처맞고는 쓸쓸히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퇴사를 대하는 맘이 좀 더 담백해졌다.


'안녕 후배들아, 시조새는 이제 여길 떠난다.'


후배들에게는 메신저로 소식을 전했다. 올해 5월 사무실 이전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같은 사무실을 썼던 후배들이다. 희한하게 나를 포함한 8명 모두가 집안의 막내고 낯가리는 인간들인데 유머 코드가 맞아 우리끼리만 시시덕 거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 순간들 덕택에 숨 막히는 공간을 버틸 수 있었다.


사무실 근처 가장 예쁜 곳이 이 정도


사무실은 공장과 물류센터가 밀집된 공단지역에 있었는데 한마디로 열악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질 않아 단체로 독감에 걸리거나 발가락 동창이 생기기도 했다. 오래된 창문 틈으로 비바람이 들이치고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인간용 엘리베이터로 사용해서 탈 때마다 사고가 날까 조마조마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경비원을 해고하고 회장이 키우던 새끼 백구 한 마리를 가져다 놓기도 했는데 불쌍한 강아지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피부병에 심하게 걸려 동물학대로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사무실로 들어온 새 한 마리


정글 속 야수 한 마리


우리는 화장실 창문 밖의 벌이 바글거리는 벌집을 목격하고 벌떼같이 모여서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사무실 안에 새가 들어올 때면 다 같이 내보내 주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애썼다. 바퀴벌레 출몰 시에는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쳐도 누군가가 나서서 반드시 죽였고 귀여운 길고양이를 발견하면 다 같이 멀리서 지켜봤다.


만취해서 뻗은 막내가 웃으며 토하는 모습을 구역질을 참아가며 함께 지켜봤고(고개는 돌려줬다) 우리의 악인이었던 그녀가 쌍코피를 흘리며 강냉이가 깨진(119를 불러줬다) 혼돈의 회식 현장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순간들을 함께했다.


마지막으로 거래처분들에게 연락했다. 친밀하게 지내지 못하는 나라도 분명 고마운 분들은 있었다. 낯가리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어색할수록 표정이 더 차갑게 식어버린 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해해 달라고 할 순 없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노라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에 그럼에도 예의를 지켜가며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평소 부담스러워했던 거래처 이사님이 인생 선배로써 이야기하건대 나같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결국엔 잘되더라고 살다 보면 한번 쉬어가는 구간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고 계속 그렇게 살면 된다고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담담하게 해 주셨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진심일지도 모르는 상대방의 마음을 항상 거짓이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그 마음에 거짓이 90%라 해도 나머지 10%엔 진심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 10%를 애써 모른 척했다. 인생에 소중한 인연이 될 사람들을 스스로 쳐내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관계들이 끝나는 지금에야 그 마음들에게 눈길이 간다. 관계에서 상처 받기 싫어하는 비겁한 내 마음이 이제는 용기를 내길 바란다.


퇴사를 알리는 것은 내가 좋아했던 이들도 날 좋아했다는 것을 확인했던 순간이었고 그들의 진심과 내 진심을 보았던 순간이었다. 그것으로 된 거다.


이제 시조새의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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