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담의 시간들.
사장과 면담을 했다. 이번 조직개편을 단행한 것은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는데 네가 퇴사한다고 하니 참으로 섭섭하다길래 냅다 한마디 해주려는 찰나 말 허리를 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뭘 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몇 바퀴 돌려진 말들이 이어졌다. 평소 같으면 그 맥락을 찾으려 경청했을 테지만 듣다 보니 깨달았다. '아. 나 이제 그럴 필요 없지.'
대신 몇 년 사이 확 늙어버린 사장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영락없는 70세 노인의 손이었는데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장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딱 1년만 쉬고 돌아오면 그때 다시 일하자고 했다. 나는 검버섯이 잔뜩 올라온 그 손과 악수하며 건강하시라 했다.
부사장과도 면담을 해야 했는데 그는 회장의 첫 번째 아들로 퇴사 의견을 밝혔을 때 날 붙잡으려 시도했지만 그건 내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면담 전 여러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해서 내가 이곳에 완전히 맘이 떴음을 확인했다며 안 먹겠다 정중히 거절한 쿠키만 몇 번이나 먹으라 권했다.
그리고는 현재 가지고 있는 건물들을 250억 원을 들여서 리모델링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고 9월 중에 회장에게 기획안을 보고할 거라 했다. 그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내게 설명했는데 이미 한물가고 있는 것들을 몽땅 집어넣은 특색 없는 시안을 보면서 당신은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밥벌이를 한 적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사장이 그랬듯 리모델링 사업에 착수하게 되면 그때 함께 일하자고 했다. 나는 대신 이곳에서 오래 일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그만큼 네가 잘했기 때문이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퇴사하는 사람에게 조차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신 나중에 함께 일하자는 말 한마디 해주는 것을 마지막 선의라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설픈 선의는 상대방을 더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하긴 그들은 내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었지.
면담이 어떻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회사에 대한 어떤 기대 같은 것이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나 보다. 그 찌꺼기들이 끝내 씁쓸한 맛을 느끼게 했지만 끝까지 변하지 않을 회사를 확인해서 다행이었다.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의 실패는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숨 바쳐 일하지 않는' 직원들 때문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생각 없이 예전에 그랬듯 개인의 역량으로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생각했다. 성과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고 일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는 태도를 취한 체 직원들의 의견은 어리석은 투정이라 치부했다. 30년 전의 성공 신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회사를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람들인 것이다.
변하는 것들이 무섭다고 말하지만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그 세상이 전부가 돼버린다. 그곳에 갇혀서 변화의 필요성을 애써 외면하며 오히려 그대로 있는 것이 옳다고 자위하며 변해야 하는 일에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는 지경이 되었었다.
어이없는 면담 중에 사장의 늙은 손에 눈길이 갔던 것은 어쩌면 나와 같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손을 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