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는 습관

나는 욕하는 것을 좋아한다.

by 윤비

항상 내일 출근 안 할 것 같은 책상 상태를 유지했었는데 이제야 진짜 퇴사를 위한 정리를 했다. 컴퓨터에 있는 자료들은 시즌별로 정리하고 개인 흔적은 남김없이 삭제하고 옮겼다. 알림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업무용 네이버 캘린더에서 빠져나오고 회사 수첩과 캘린더를 버렸다.


마지막 PPT를 만들었다. 동기, 후배들을 위해 퇴직자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퇴직자가 모르면 주지 않을 여직원 회비, 상조회비 수령 방법과 연차수당, 퇴직금, 퇴직소득세 계산법과 건강보험, 국민연금 처리 절차에 대해 정리했다. 그들은 나처럼 헤매지 말고 똑소리 나게 퇴사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제 해야 할 것은 송별회 밖에 없었는데 코로나 덕에 수십 명이 모인 술로 찌든 송별회는 피해 갈 수 있었지만 대신 소규모로 5번의 식사를 했다. 하아.


먼저 20년 차를 넘긴 선배 두 명과 식사를 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을까에서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란 생각이 더 많아질 때쯤부터 선배들이 후배들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는데 내 꼰대력이 상승했기 때문이겠다.


내 사수였던 성 탐정은 이곳에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40년 차까지 다니실 거예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그 말에 미쳤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웃어넘길 줄 알았던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니야. 이제 여기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진짜 40년 다닐 생각인가 보다.


회사에서 성 탐정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다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후배 중 한 명이 도로에서 맨홀 아래 작업하는 사람이 머리를 쑥 내미는 순간 그 옆으로 자동차가 쑤웅 지나가는 아찔한 상황을 목격하고 놀래 자빠질뻔한 썰을 풀어놓았는데 다들 그 사람 죽을 뻔했다 참말로 다행이네 할 동안 그녀는 거기엔 맨홀 뚜껑이 없지 않냐고 되물으며 그 썰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추궁했다. 물론 궁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대화에서 흐름을 타지 못하고 탐정처럼 사실관계를 추적해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즐거운 대화를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 탐정에게 이사는 멘토이자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인데 이사가 그녀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녀를 씹어 돌리는 일이 허다한데 전혀 모르는 눈치다. 오히려 내게 이사에게 잘 좀 해보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는데 '너나 잘하세요'가 목 끝까지 찼지만 '저는 이사님을 존경하지도 않고 오히려 싫어하기 때문에 잘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라고 말해서 그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게 '이사가 당신 욕을 겁나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았다. 모르면 모르는 체로 둬야 할 일도 있는데 꼭 사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성 탐정처럼.


하지만 성 탐정은 내가 겪어본 선배들 중에서는 제일 괜찮은 사람이다. 일에 열정적이고(덕분에 여러 사람 치를 떨고 나가떨어졌지만) 본인의 단점이 뭔지 파악은 하고 있으며(결코 고쳐지지 않지만) 적어도 본인의 입지를 위해 타인을 폄하거나 후배들을 인격적으로 모욕하진 않는다.


나머지 선배 이식신은 남자였다면 이사에게 훨씬 더 큰 사랑을 받았을 테지만 불행히도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디테일한 의전으로 에이스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녀가 거래처에게도 자신이 하는 디테일한 의전을 요구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 한마디로 갑질이 심하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저거 언젠가 한번 고소당하지 않을까 싶다.


성 탐정과 공통점이라 한다면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다만 판단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백업자료가 세팅되어야 하고 검토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어 납기와 생산에 항상 문제가 발생하지만 본인이 일을 잘한다 생각한다. 이런 특징은 대화에서도 드러나는데 굉장히 말을 심오한 척 재미없게 두서없이 늘어놓아서 옆자리에라도 앉게 되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암튼 이식신은 에이스니까 잘리는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죽을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그만두는 일은 힘들 것이라 했다. 네네. 대단하십니다.


그들 밑에서 최대로 버틴 사람이 12년 차에 그만뒀는데 내가 17년 5개월로 갱신하고 결국 그들보다 먼저 퇴사한다. 한 때 내 인생을 너무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그만큼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맘을 많이 내주었을까.


나는 어리석게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싫은 사람들의 욕먹을 만한 언행을 캐치해서 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다. 다분히 변태적인 습관이라 할 수 있다. 피할 수 있음 피하고 보지 않으면 될 것을 기를 쓰고 지켜보면서 정말 이상한 사람들임을 확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나에게는 관대하면서 그들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내 욕을 정당화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비겁한 방어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욕을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소진돼버렸다. 그럼에도 커피 끊는 게 힘든 것처럼 욕 끊기도 어찌나 어려운지! 심지어 아직도 난 욕하는 걸 좋아하고 있네?!


난 선배들이 꾸준히 싫었다. 그들은 내가 혼자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울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렇게 날 불행하게 만들었던 건 나 자신의 몫이 가장 컸다는 걸. 여전히 그들이 싫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식당을 예약하고 선물을 고르고 시간을 내준 선배들이 고맙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신들을 싫어하는지 모를 그녀들에게 미안하다.


이제 내 인생에서 욕할 사람은 남편 한 명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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