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의 모든 시간과 관계의 끝이 보인다.
팀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팀장은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하는 듯 보였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의무의 식사에 충실할 때 정 MD는 대뜸 '과장님 애 낳으려고 퇴사하는 것 아니냐'고 한방을 날렸다. 남편과 내가 섹스를 해야 일어나는 사적인 이야기를 왜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그건 정 MD는 애 낳으려고 와이프랑 섹스를 몇 번 했냐고 질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하하 이 나이에 애 낳으면 죽어요'하고 화제를 돌렸다.
같은 팀으로 일한 지 4개월 동안 단 10분도 말한 적 없었던 그는 뜬금없는 질문들을 앞, 뒤 맥락 없이 기습으로 던지곤 했다. 사는 집이 얼마냐고 물어본다던지 대학교 때 AA(그 당시 아메리칸 어패럴의 옷들은 깊게 파이거나 딱 달라붙는 섹시한 스타일이 주류로 내가 평소 입지 않는 스타일) 자주 입지 않았냐고 물어본다거나 이영애 닮았다는 소리 안 듣냐는!(이영애요?)
정 MD는 타 부서에서 대형사고를 치고 혼자 숨기려다가 들키고 말았는데 도리어 큰소리 떵떵 치며 자르라고 하는 걸 회사에선 육아휴직(왜??)으로 마무리 짓고 2년 쉬다 컴백한 인물이다. 전화 통화하는 것만 들으면 세상 프로페셔널인데 일을 못해서 팀장조차 혀를 내두른다. 내가 볼 땐 둘 다 바보가 맞는데 그 바보들은 서로를 바보라고 생각해서 서로를 한심해한다.
마지막 식사자리에서도 그들은 내 자산 규모에 대해 궁금해한다. 팀장은 내 자산이 ㅇㅇ억 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맞냐고 물어본다. 평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런 게 왜 궁금하냐 월급쟁이가 돈 모아봤자다 너에 비하면 난 있는 것도 아니다 부럽다 좋겠네 하하하 했을 일을 '내가 그 정도밖에 없을 것 같아요?'라고 되물으니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나는 너처럼 부모가 사준 집에서 살며 물려받은 땅 팔아 부동산 투자해서 몇 억 번 것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르다. 평소 절약하며 사는 나를 향해 비아냥 거리던 너는 그렇게 펑펑 쓰면서 평생 여기 다니라고. 난 네가 여기서 10년 더 다녀도 못 모을 돈 다 모으고 떠난다고 유치하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눈치 없는 정 MD는 진작에 과장님 옆에서 배웠어야 하는 거였다고 탄식을 쏟는다. 팀장은 그를 째려본다. 식사는 끝났다.
선택의 문제였지만 내가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 인정받고 회사에 남아있는 건 그 사람들이고 못 견디고 나가는 사람은 나다. 하지만 난 목표를 달성했다. 입사 때부터 월급의 70~80%는 무조건 저축했고 40세까지 모으려고 했던 금액을 다 채웠다. 그것마저 패배감에 쩔어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패배는 했고 돈은 모았다.
이사도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고 싶어 하진 않았지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코로나를 핑계 삼아 회사에서 치맥이나 하자 했다. 그것으로 내 송별회는 별다를 것 없는 회식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어 했는데 상관없었다. 우와 좋은 생각이다 간단하게 치맥이나 합시다 치킨 좋아합니다 했는데 이식신이 그건 아닌 것 같았는지 회사에서 홈파티하는 것 마냥 일이 커졌다.
백억진이 모든 걸 준비했다. 내 송별회지만 메뉴 선택권이 내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이식신의 맘에 드는 메뉴를 골라야 했는데 며칠 동안 고민한 메뉴를 그녀에게 CFM 받고 준비하는 동안 백억진이 홀쭉해졌다. 괜히 내가 미안 해지지까지 한다.
심혈을 기울여 시킨 메뉴를 보고 이식신은 음식 양이 적다. 이것만 시켰느냐. 다른 건 언제 도착하느냐. 왜 이건 안 시켰느냐. 백억진은 사색이 되어 안 그래도 말린 어깨가 더 말려들어갈 것 같다. 샐러드, 스테이크, 칼라마리, 감바스, 스파게티, 감자튀김, 모둠 치즈, 피자, 마지막으로 모둠회가 배달되고 나서야 투정이 멈췄다.
어쨌든 나로 인해 저녁시간을 할애한 것은 고마운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보려 애썼지만 계속 입꼬리가 내려가고 입이 무거워지고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배에 가스가 차서 더 이상 음식도 들어가지 않을 때 나 대신 애써서 별의별 말을 다 끄집어내서 대화에 공백이 생기지 않게 애쓰는 동기들이 보인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선물해야 할 인원이 20명 정도라 대단히 거창한 것들은 준비하진 못했지만 버려지지 않고 유용하게 쓸 아이템을 고르려고 애썼다. 이식신은 왜 편지는 없냐고 되묻는다. 편지를 써볼까 생각은 했지만 예의 상 쓴 편지를 읽었을 때의 기분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할 생각은 들지 않더라. 고맙지 않았는데 고맙다고 다시 볼 생각 없는데 다시 보자고 하는 씁쓸한 말들. 마지막까지 거짓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거짓을 말하면서까지 끝까지 애쓰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맞겠지만.
마지막으로 후배들과 식사를 했다. 후배들이 우리 집으로 오고 싶어 해서 집으로 초대했다. 사실 사적인 공간을 오픈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게 첨이자 마지막이 될 거란 걸 알았다. 후배들은 수많은 이벤트에 특화돼있어서 척척 기계처럼 풍선을 불고 선물을 준비하고 케이크를 주문해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웃었다. 이상한 사진 백 장쯤 남기고 그들은 떠났다.
풍선만 덩그러니 남은 거실에 잠시 앉았다. 서로 말하려고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공간은 너무 고요해서 온몸이 붕 뜨는 듯했다. 연말에 또 찾아오겠다고 재잘거렸지만 우리가 연말에 만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럼 어떤가. 마지막 시간이 이토록 즐거웠는데.
이제야 비로소 회사에서의 모든 시간이, 관계가 끝이 났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