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

시조새의 시간이 끝났다.

by 윤비

전날 술을 마시고 차를 회사에 두고 퇴근해서 마지막 출근은 버스를 이용했다.


회사는 주차장이 매우 협소해서 2부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차를 주차할 수 없는 날은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회사 물류 주차장에 주차하고 오전 8시 35분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다.


셔틀버스에서는 다들 안녕하세요 인사 한마디 없이 자리에 착석한 후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마냥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내릴 때도 기사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나 혼자 '고맙습니다'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인사성이 좋은 사람이었냐면 절대 아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싶어도 왠지 그 순간에 눈을 마주치고 '안녕하세요'를 내뱉는 것이 창피해지고 말아서 회피해버리는 그래서 인사성이 없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는 매번 인사하기를 실패하고 후회하고야 마는 소심한 인간이다.


하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 공간에서는 고맙습니다를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매번 어색함을 짓누르며 고맙습니다 도전을 4개월간 이어 갔었는데 마지막 출근 날은 기사님께 고맙습니다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1층 마케팅팀에 계신 전 부서장을 찾았다. 타고난 분위기 메이커 같지만 사실 심한 낯가림이 있는 배 부장은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내게도 쭈뼜대는 경향이 있었다. 키가 작아 자리에 앉아 있으면 보이지도 않던 그는 사무실 제일 구석진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고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과장된 몸짓으로 아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사무실 중앙에서 시작해서 나를 떨쳐내고자 하는 배 부장의 무의식적인 발걸음으로 인해 종국에는 회사 앞마당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다시 1층으로 걸어 들어가 품질관리, 소비자상담 팀장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이렇게 같이 오래 일하던 사람이 그만둬서 마음이 참 서운하고 이상하다고 했다. 세월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나 역시 서운함 맘이 감돌았으니 말이다.


3층 회계팀으로 가서 법인카드를 반납했다. 신입 때 날 그렇게 무섭게 다그치던 김 차장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그녀 주변엔 우울한 무기력감이 감돌았다. 아이고 어째 이렇게 이쁜 분이 그만두네 수고했어요 한다. 뜬금없는 외모 칭찬이지만 날 예쁘다 해주는 사람이 아직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그녀가 불임의 상처를 완전히 걷어내고 다시 생동감 도는 독기 품은 표정을 짓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3층에 인사할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그곳은 워낙 조용해서 내 말 한마디에 수 십 개의 귀가 쫑긋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등을 동그랗게 말고는 뒷걸음질 쳐 내려왔다. 대신 사내 메신저라는 게 있지 않은가? 영업 MD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문 과장은 영업 MD로 발령받기 전에 기획 MD였던 사람인데 내가 신입일 때 담당 MD였었다. 그 역시 이사의 눈 밖에 나서 이리저리 전전하다 영업 MD로 정착했지만 회사에서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르고 친절했었다. 지금은 그도 흑화 되어버린 듯 하지만 말이다.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난 뒤 주 대리의 연락이 왔다. 사실 그에게도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팀장한테 대표로 했음 됐다 하던 참이었는데 그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인사하려고 했다는 나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듯 '할 생각 없었잖아요?'라고 되받아친다. 역시 예리하다. 직접적으로 함께 일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친하지도 않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나와 같은 부류라는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는 주 대리도 싫어했다. 그래서 그도 한참 동안이나 이사의 이간질로 시달리다 영업 MD로 갔기 때문에 우리 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맙게도 왜 과장님이 그만두냐 그 새끼가 그만둬야지 나가야 될 사람은 안 나가고 왜 일 잘하는 사람이 나가느냐 회사 꼴 잘 돌아간다 했다. 우리가 같이 일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개똥밭에서 함께 뒹군 세월이 얼마냐고 나가서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고 이제 직접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건너 건너 좋은 소식 듣게 되길 바란다 했다.


회사의 마지막 날을 수없이 상상해보곤 했다. 서운함이 섞인 짜릿한 해방감을 느낄 거란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실제 마지막 날 나를 지배했던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이 감정을 가장 많이 맞닥뜨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주 대리의 말대로 같은 개똥밭에서 구른 것만으로도 나는 모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오후 6시가 다 되어갈 때쯤 자리를 정리하고 2층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각 팀을 방문할 때마다 후배, 동기들은 내가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되는 냥 졸졸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어 댔다. 죽도록 싫어했던 그들에겐 스치듯 웃음으로 인사하고 마지막 순간들을 맘에 담았다.



회사 앞마당에서 동기들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신입 때 백억진과 점심때마다 나와서 사진 찍기 놀이했던 곳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마치 연예인이 된 양 후배들이 우르르 나와서 사진을 찍고 남아있는 2층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구경하며 손 흔든다. 웃고 정신없는 사이 짜르르한 기분이 들어 왼쪽을 보니 백억진이 울고 있다. 울지 말라고 호통치며 나는 꽃다발과 선물 보따리를 들고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차 주위에 오종종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회사를 빠져나왔다.


운전하는 동안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정신이 차츰 돌아오자 왼쪽 좌석에 올려둔 꽃다발과 선물들이 눈에 보인다. 끝이구나. 그제야 울적한 맘이 올라온다. 나의 퇴사에는 끝내 통쾌한 해방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퇴사 한지 두 달이 다 돼가는 지금. 나는 그 과정을 디테일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내가 어떤 회사생활을 했는지 내가 어떤 맘으로 퇴사를 결심하고 그 과정 중에 어떤 감정들을 만나야 했는지 그래야만 퇴사 후의 생활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번 생의 회사생활만큼 해낼 자신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정도로 내 능력치를 한참 벗어나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틴 것 같다. 이제는 내 능력만큼만 버티고 살아보고 싶다.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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