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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의 기회를 걷어차고

좋소 한 달하고도 2주 차

by 윤비

아무 고민 없이 살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고민은 게임기 안의 두더지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 올라 나를 시험한다. 순발력이라고는 없어서 좀비한테 단번에 물려버릴 나는 망치를 쥐고 깐족대는 그들을 말없이 주시한다.


회사의 대표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는 회의 도중에 혼자서 견과류를 까먹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은 흡사 영화 ‘서브스턴스’에서 새우 까먹는 늙은 남자를 연상케 했다. 역겨워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시선을 통제하려 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늙은이의 얼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어라? 코 성형을 했네. 아무리 흰머리가 섞인 고급 가발을 써도 뒷머리의 들뜸은 커버하지 못했군. 눈 밑 지방 재배치를 받으면 당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모르나 보구만.(하지만 난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 눈동자와 흘러내린 볼살에 물욕이 그득하게 채워져 있네. 탐욕스러운 불독 같다. 아니야, 불독은 귀여워. 과분해.


원래 대표란 작자들은 다 이 모양인지 내가 이런 사람들만 만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라면 잘 나가는 사람들과 어울린 자신은 성공했고 우리는 별 볼일 없는 것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나이 먹고 이딴 취급이나 받으며 월급쟁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당신은 50년 동안 잘 나가는 사람 옆에서 붙어먹으며 살아왔구나.


언젠가부터 사람을 대할 때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인가부터 보게 되었는데 나의 당연한 기준이 남들에겐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빈번했고 그 차이가 클수록 관계의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졌다. 이 코 성형남은 단 한 번의 회의로 내 바운더리 밖으로 배치되었지만, 그의 말에 일부 수긍하는 부분도 있다. 잘 나가는 사람 옆에 붙어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주변에 누가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과연 늙은이가 돼서도 옹알이하는 아기들처럼 맘에 안 들면 냅다 소리를 싸지르고 음식물을 쩝쩝거리며 업무지시를 하는 게 당연한 사람들 곁에서 나는 나의 상식과 예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틈만 나면 탈출하고 싶은 와중에 S가 짠한 나의 소식을 듣고 부산의 일자리를 제안했다. 너무도 매력적인 자리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과 이곳에서 버텨내서 본때를(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가슴이 쿵쾅쿵쾅 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게 주어진 진짜 기회이고 이걸 놓치면 나도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무 때나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부산으로 가면 월급은 줄어들지만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안락한 나의 집과 가족, 친구들이 있다. 이곳에서 버티면 얻게 되는 것은 단지, 조금 더 많은 월급. 그것 말곤 단호하게 말할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선뜻 이곳을 떠나기가 꺼려졌다.


아직 무 하나도 자르지 못한 것이다. 이곳이 아무리 좋소라도 나는 무라도 잘라야 하는 인간이었다. 출근한 지 하루 만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파악했지만 일은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고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1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 마음이 선뜻 부산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직감을 믿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울렁이는 마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고 그러던 중 부산의 집을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의 고민은 이것으로 종결되었다. 부산 집은 이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11월부터 살게 된다. 그들은 나의 살림살이가 맘에 들어 내가 서울까지 들고 가지 못하는 가구들을 모두 그대로 쓰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게 반가우면서도 싫었다.


이제 겨우 한 달하고도 첫 주가 지났을 뿐인데 일 년 하고도 첫 주가 지난 느낌이다. 회사도 내가 온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나도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여자는 미친 게 아니라 몹시 지쳐 보인다. 슬픈 얼굴을 보고 애써 웃었다. 괜찮아 웃어. 웃자. 찡그린다고 운다고 상황이 바뀌냐. 웃으면 인상은 바뀔 수 있잖아. 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또다시 새로운 고민이 생기겠지만 지금과 같은 고민은 아닐 거야. 그러니 웃어라. 웃자. 기꺼이 미래의 고민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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