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1일 차

백수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by 윤비

퇴사를 결심하기 전 퇴사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주로 퇴사 후에 아무 계획 없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것들로만 골라 읽었는데 읽다 보면 '또 속았네'라는 탄식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들은 아무 계획 없다고 해놓고서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창의적인 밥벌이를 준비해왔고 하려 했다. 그건 퇴직 후 이직했다는 고백보다 더 큰 배신감을 맛보게 했다. 나는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한 이들의 경험담 찾기를 포기하고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한 사람이 되었다.

퇴사 1일 차.


카톡 알림음에 잠을 깼다. 김미수가 퇴사 축하금 30만 원을 보냈다. 역시 김미수의 스케일은 어마어마하잖아. 이불속에서 두 다리를 쭉 뻗자 온몸에 찌르르한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가 이내 진민영의 카톡으로 완전히 잠에서 깼다.

사내 배포 문서에 '윤비가 열람하고 있어서 파일을 열 수 없다'는 캡처 화면을 보내며 너는 아직 회사에 있냐고 물었다. 어제 회사 메일함의 수신 현황을 ‘0’으로 만들려고 읽지도 않을 문서를 클릭했다가 첨부파일이 안 열려서 제기랄, 이것도 안 되는구나 하고 컴퓨터를 꺼버렸었다. 그게 계속 열람 상태로 뜨는 모양인데 회사에 조금이라도 불편을 끼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것들아 파일 못 연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베란다에 던져놓은 이케아 안락의자에 몸을 쑤셔놓고 멍하니 밖을 구경했다. 이 의자는 13년 전 물건인데 분명 맘에 쏙 들어 샀지만, 이제는 버리고 싶어 안달 난 물건이다. 끊임없이 버리기를 시도했건만 반대하는 남편 때문에 결국 못 버렸다. 그는 뭐든 한번 들인 물건은 버리지 못하고 나는 뭐든 거슬리면 가차 없이 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버리고 싶은 의자에 앉아 우리 집의 자랑 오션뷰를 만끽한다. 그래 이것 때문에 18년 동안 그 개고생을 했지. 그럴만하고만 흠흠 거리다가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 게 번뜩 생각나 5분도 못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년 전부터 하나둘씩 사 모았더니 어느새 집안 온통 초록이다. 나는 화분대에 있는 화분들을 전부 베란다 바닥에 내려놓고 화분 구멍에서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물을 듬뿍 준다. 거실, 침실, 주방에 있는 화분들도 다 베란다로 옮겨와서 물을 주기 때문에 화분에 물을 주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지경이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즐기기보단 해치워야겠다는 심정으로 하곤 했는데 그저 5분이라도 더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나는 습관처럼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단언컨대 나는 느긋한 맘을 가져 본 적이 별로 없다. 본디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항상 긴장했기 때문에 그 콩닥거림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다. 그게 불안 인지도 몰랐고 다른 이들도 당연히 나 같은 줄로만 알았다. 나는 입 밖으로 말을 뱉어낸다. '이제 급하게 할 필요 없잖아?'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화분 밑으로 물줄기가 졸졸 흐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 화분을 번쩍 들어 올려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느긋함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물을 주자마자 재빨리 귀리 우유를 타 마시고 남편이 걷어놓은 빨래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점심은 간장 국수를 먹기로 한다. 진민영의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세수도 안 한 추레한 얼굴을 비춰주었다. 핸드폰 넘어 후배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상이 끊어지는 바람에 대화다운 대화는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영상 속 장소가 우리가 점심때마다 모여서 깔깔거렸던 회의실이고 지금이 12시 40분인 것을 알았다. 난 지난주에도 이번 주에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때의 시간이 몇 년 전 일이고 내 집 주방에서 간장 국수를 먹고 있는 것이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지만 나는 쉽사리 소파에 드러눕는 일은 하지 못했다. 소파에 눕는 순간 오늘 아니 내일 아니 어쩌면 몇 달을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파에 앉는 순간 큰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듯 나는 악착같이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퇴사의 과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회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내가 회사 생각을 멈출 것을 알았다. 그 과정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나는 사소한 일도 비상하게 기억하는 편인데 사람들이 내가 그런 걸 알면 소름 끼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인정하는 나의 유일한 능력이며 기쁨이다. 나는 혼자 조용한 공간에서 지난날의 기억들을 곱씹으며 제멋대로 미래를 공상하기를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을 맘껏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으리라. 그렇게 퇴근시간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썼다.


남편이 출장을 간 터라 하루 종일 혼자 보냈다. 저녁에는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찾아내 콩나물비빔밥을 해 먹었다. 콩나물비빔밥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생각난다. 결혼을 하고 보니 진짜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걸 알겠다. 그걸 내가 했다.



엉덩이가 다 헤진 나의 운동 파트너, 엑사이더를 탔다. 장난감같이 움직이는 자동차,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요트, 먼바다로 나간 고깃배들이 내뿜는 노란불 빛, 스포츠센터에 있는 실내 수영장의 반짝이는 윤슬을 구경했다.


향기가 끝내주는 바디워시로 몸 구석구석 꼼꼼히 씻고 진민영이 선물해준 갈바닉 마사지기로 열심히 얼굴을 문지르며 피부미녀가 되기로 다짐한다. 맥주를 마시고 tv를 보고 깔깔거렸다.

하루 종일 빈틈없이 꽉 찬 나의 퇴사 1일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