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산다.

백수가 되면 달라지는 것

by 윤비

미각과 후각이 발달한 편이라 음식에 어떤 식자재가 쓰였는지 잘 아는 편이고 조금이라도 상한 음식도 골라낼 수 있지만 식탐이 강한 탓에 음식을 까탈스럽게 먹지는 않는다. 다만 ’ 맛있다 맛없다 ‘의 확실한 취향이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그냥 배를 채워 넣는 점심식사를 했다. 퇴사하기 몇 년 전부터는 다행히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거의 1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배달 음식을 먹었다. 지금이야 거의 모든 음식을 배달해서 먹을 수 있지만 그 당시 배달되는 음식들은 매우 제한적이라 주로 김밥천국, 중국집, 백반집, 칼국수집을 5일 동안 돌려 먹었다.


위생상태까지 의심되는 불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면 허했다. 허한 마음을 채우려 밥을 먹자마자 군것질을 하고 저녁에는 기필코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보상심리가 발동되어 폭식을 했다. 배가 아플 정도로 먹고 나면 후회가 정말 막심하게 들어서 다이어트를 다짐했는데 폭식의 나날은 강약의 상태만 다를 뿐 꾸준하게 이어졌다.


퇴사하면 하루 한 끼는 반드시 정성 들여서 만든 맛있고 건강한 식사를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2인 가족이라 식자재를 아무리 적게 사도 한 번에 다 먹지 못한다. 그래도 식자재를 썩여 버리는 것은 용납지 못해 무 하나를 사도 끝내는 다 먹는다. 무를 나박하게 썰어서 된장찌개에 넣고 두툼하게 썰어서 두부나 생선조림에 넣어서 조려 먹고 굴무침, 파래무침 등 각종 무침 요리에 무를 채 썰어놓고 무와 마늘만 들어간 담백한 뭇국을 해 먹거나 떡볶이에 무를 넣어도 정말 맛있다. 그래도 무가 남으면 얄팍하게 썰어서 쌈무를 만들어 놓는다.


먹을 것을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진이 빠졌다. 식자재를 사러 가고 다듬고 씻고 썰고 데치고 볶고 삶고 무치고 굽는 것은 빠르면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잘 먹고사는 일 도 쉽진 않았다.

김치말이국수, 참치새싹비빔밥, 마파두부와 현미밥
명란들기름파스타, 엉터리 감자뇨끼, 알리오올리오
단팥죽, 월남쌈,리틀포레스트 응용 감자샐러드
굴무침, 갈매기살,안성탕면으로 만든 내맘대로 탄탄면
직접만든 사과쨈과 토마토브루게스타, 당근김밥, 파래무침


그래도 끼니 만들기를 멈추지 않고 해온 결과 나는 음식 솜씨가 꽤 늘었고 신기하게도 식욕이 많이 사라졌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식탐이 강했던 내겐 생소한 경험이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도 오후 3시까지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에는 자연스럽게 배가 고프지 않아서 하루 한 끼만 먹는 생활이 이어졌다. 한 끼를 잘 챙겨 먹으니 신기하게도 음식에 대한 집착이 누그러들었다. 게다가 퇴사 후 에너지를 허비하게 만든 딥-빡침도 사라져서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폭식 습관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역시 퇴사가 만병통치약인 건가.


마음이 건강해지는 방법을 잘 모르지만 어쩌면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해 먹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에게 잘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전 01화백수 1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