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COVID 이후 처음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설 때 보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외할머니가 매일 전화를 할 때마다 코로나 조심하라고, 명절 때마다 외로울까 봐 갈까? 하면 빈말 없이도 오지 말라고! 외지인이 제일 문제라고! 소리치더니 이번 명절 전에는 처음으로, 외롭다고 오라고 하셨다.
외가에 몇 없는 손주들 중 장녀인 내가 간신히 6개월간 밥벌이를 하다 계약이 끝나는 날이 공교롭게도 명절 연휴 하루 전인 금요일이었기에, 설 명절에 간다 호언장담을 하였다. 엄마도, 할머니도 나의 "가겠다"가 모든 행위의 수락 신호라도 되는지 모두 기대하듯 "무슨 짐을 싸지?" "이건 챙기지 마라, 집에 다 있다." 이런 전화들이 매일같이 오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만 시큰둥하게 그래~ 넘기기 일수였다. 내가 생각한 기한은 최대 2주였기에 잘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무리 코로나가 심하다고 하지만 경기도에서도 걸리지 않았으니 카페에 몇 번 가거나 동네 책방이나 소품샵만 가도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할머니가 제일 약한 삼촌이 늘 우리 편이었다.
"할머니가 가서 불은 왜 켰니, 배달음식 시킬 때 코로나가 어떻고 나갈 때마다 못 나가게 하면 전화해"
얼마나 든든한 말인지. 올해 86세이신 할머니는 여전히 일을 하시고 계실 정도로 정정하신데 홈그라운드에선 유독 그러하셨다. 실제로 20년도 여름, 할머니 일을 도우러 홀로 순천에 내려왔을 때 일 하느라 예민한 할머니 덕에 밥 먹을 때 기지개도 못 피고, 8시 전에 일어나도 늦게 일어난다고 혼나기 일수였으니 매일 식사 때마다, 잘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경험이 있었다.
소리도 못 지르던 내가 엄마가 순천에 날 데리러 가기 위해 내려왔을 때. 엄마를 만나 더 기세 등등해진 할머니가 온갖 말을 해댈 때 참지 못하고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지. 집에 돌아간 날에도 어린 동생이 건드려 창피하고 미안하지만 소리를 질렀기에 엄마와 삼촌은 나와 할머니의 오랜 접촉을 웬만하면 피하게 하려 했었다. 그렇다. 내가 유독 할머니와 맞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2주는 괜찮겠지.
코로나는 여전했기에 사람이 제일 없을 것 같은 고속버스 제일 첫차를 예매하고-심지어 주위 한 석을 더 예매했다.- 마스크에 페이스 실드까지 장착하여 떠나니 멀게 느껴졌던 순천은 꽤나 금방이었다. 이렇게 금방 오는 것을. 엄마도 그리 느꼈는지 계속해서 "금방 오네...."만 반복했다.
매번 할머니가 여럿이 움직이는 것보다 홀로 움직이는 게 낫다며 기차를 타고 올라오셔서 우리가 몇 번 정도만 기차를 타고 움직였었는데, 그마저도 길게 느껴졌던 거리가 첫차를 타고 눈 좀 감으니 금방이었던 것이었다.
딩동, 벨을 누르고 전화를 하니 할머니가 후다닥 나오는 소리가 제법 가깝게 들려왔다. 문이 활짝 열렸을 땐 드라마 눈물씬의 한 장면처럼 할머니가 우릴 보자마자 바로 울음을 쏟아냈다. 어린 동생을 안고 엉엉 울 때 엄마와 나도 마주 보고 웃다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왜 이리 서러운지. 너희를 못 본 게 왜 그리 서럽던지. 너희를 보니 왜 이리 울음이 나오지."
서럽다.
고령의 할머니를 위한 것이 만나지 않은 것이고, 어린 동생을 위한 것이 만나지 않은 것이라 믿으며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같은 시에 살아도 만나지 않은 삼촌과 우리였다. 못 만나던 2년간 매일같이 몇 번이고 전화를 했음에도 직접 마주하니 아이처럼 엉엉 울며 서럽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말에 그동안의 떨어짐은 서로를 위한 것이 분명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도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더 아파왔다.
그저 집에 있으니 외출만 삼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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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방문에 할머닌 뭐라 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 평소 같으면 하지 마라, 이렇게 해라, 하던 모든 말들을 하지 않고 너희 마음대로 하라 했다. 물론, 말만 하는데서 끝난 게 아니라 자신의 말대로 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똑같았지만.
그러나 할머니의 잔소리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큰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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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첫차를 타고 오는 데다 명절 내내 밤낮이 바뀌었어서 그런지 편두통이 세게 왔는데 고개를 잠깐만 움직여도 골이 세게 움직여 계속해서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하면 움직인 근육만큼 두통이 완화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피하듯 잠을 자고 난 후에도 그치지 않아 겨우 옷을 입고 산책 겸 약국과 슈퍼를 돌며 간단하게 살 것들을 사고 집에 와 겨우 약을 먹으니 이제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왜 자꾸 눈을 긁냐?"
"어? 나 눈.. 비벼?"
간지러움에 눈을 계속해서 비비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 엄마, 나 3대가 모여 고스톱을 치느라 치열한 와중 할머니가 에쿠! 손사래를 치며 눈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 그제야 스스로 눈을 비비고 있음을 깨달으니, 제 모습을 깨달은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 지금 눈 비벼?
"알레르기....?"
신체 중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디냐 꼽으라면 많은 고민을 해야 했지만 일상 속에서 가장 약한 부위는 눈이었다. 감기 전에도, 몸이 약해질 때에도 제일 먼저 증상을 내보이는 곳은 두 눈이었다. 어이! 주인! 몸이 약해지는 것 같아! 좀 챙겨봐! 부비적 부비적.
눈을 비빌 때 가장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알레르기였다. 아니, 그런데, 무슨 알레르기? 혹시 아까 먹은 편두통 약 때문일까? 괜히 약 통을 가져와 부작용을 검색해보니 큰 부작용은 없었다.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피어싱 염증 때문에 약국에서 약을 샀는데 부작용이 심한 약이어서 온 몸이 간지러웠던 적이 있었다.- 결국 환기를 좀 시키고 눈을 최대한 만지지 않고 고스톱을 치니 조금 나아졌는데도 여전히 간지러웠다.
첫날은 그렇게 한쪽에선 곧 있을 대선으로 바쁜 뉴스들이 소리를 내고 있었고 엄마와 할머니가 모녀상봉을 하였고, 동생은 새로운 환경, 장소를 누비느라 즐거웠다.
나만이, 편두통과 알레르기로 삶의 만족감을 조금 잃은 상태였다. 내일은 좀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