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뎠던 감각을 낱낱히 일 깨우고, 잊었던 과거의 어느 날이 생생하게 스쳐지나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처마밑에서 비 오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이렇게 날 궂은 날에 빗속에 우산도 없이 남겨진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면서
그 상황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안도하곤 했다.
비가 오면 나와 세상은 단절 되는 것 같았다.
꽃잎에 내리는 빗소리, 땅위에 내리는 빗소리, 고인 웅덩이에 내리는 빗방울들
모두 제각각 소리는 다르지만 나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비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 것 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는
‘쏴아’ 하며 동시에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런 감각을 느끼기를 반복하며 비가 오면 평온함을 느끼곤 했다.
나는 불안이 많다. 집 밖을 나갈때면 밖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상상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계속 챙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방은 이사짐이 되어 있다.
옷을 다챙겨 입었는데도 여벌옷을 더 챙기기도 하고, 구두를 신은 날이면 발이 아플때 갈아신을 수 있는
신발을 챙겨야 하나 고민도 했다.
옷을 살 때에도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더러워지거나 헤질 수 있다 생각하여 같은 디자인 다른 색으로 더 사기도 했다.
쓸데 없는 미련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나에게 짐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나는 감자처럼 느껴졌다.
내 등에서 정돈되지 않은 싹들이 비전형적으로 돋아나는것이다. 그것들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 싹들을 싹둑 싹둑 잘라내고 싶다. 단 며칠만이라도 잘라내 버리고 조용히 웅크리고 싶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모든 것이 시끄럽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비소리에 둘러싸여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조금 조용해지려나.
그러면서도 젖는게 싫어서 장화를 신고 다니는 나는
약간은 모순이고, 한 없이 나약하면서도 참 답답한 존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