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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Jan 19. 2022

내가 런던의 일상을 전하는 이유

런던에 온 지도 벌써 넉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창밖의 잎이 무성하던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 왔을 때부터 매일 같은 시간에 저 나무를 사진에 남겼다가 나중에 타임 랩스 동영상으로 만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런던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2021년 가을은 코로나 사태로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기였다. 출국 직전 코로나 음성 결과를 준비해야 했고, 영국 현지에 도착한 뒤에는 자가 격리가 예고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비자까지 나오지 않아서 출발 이틀 전까지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었다.


그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새로운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살고 있다.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다 보니 동네 구석구석 골목길도 웬만큼 꿰게 되었다. 처음 왔을 때는 5분 거리도 어둠 속에서 손전등에 의지하듯 구글 지도를 따라다녔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오로지 감에 의지해서 지름길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쉬운 길도 모르고 멀리 돌아갔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는 아내의 공부였고, 나는 딸 아이의 육아를 위해 따라왔다. 조연으로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해지려 다 보니, 일과도 한국에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볶음밥부터 수제 햄버거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요리를 척척 해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이따금 놀라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집에 두고도 안 쓰던 오븐을 여기서는 전자레인지 만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쇠고기, 닭고기, 연어 등 고기 종류를 막론하고 적당히 오븐에 돌려버리면 꽤 먹을만한 요리가 되어 나온다. 나와 가족이 먹을 음식이라는 생각으로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다 보니, 솔직히 나가서 먹는 것보다 낫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사이 생존 영어도 많이 늘었다. 특히 말을 못 알아들을 때 쓰게 되는 “Sorry.”는 이제 정말 현지인처럼 말할 수 있다. 내가 온종일 “Sorry.” 외에 추가로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내가 외국인인 줄 모를 것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런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이곳 생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요즘 나의 소일거리 중에 하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유명한 관광 명소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공원의 풍경도 꾸준히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아내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관해 조언을 건넸다. 내가 올리는 사진들이 혹여라도 지금 코로나19로 고생하고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한국에서 코로나19 방역을 담당하던 공무원이 아니었나. 자칫했다가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며칠 동안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곳에서 남기는 글과 사진들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은 ‘애초에 나는 왜 이곳의 일상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려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결국 나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기록’이다. 내가 런던에서 보내는 시간을 블로그에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록 그 자체가 목적이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나의 가족들을 비롯한 개인적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행복한 순간을 담은 사진을 조금이나마 남기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아니 어쩌면 일부러 안 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삶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둘째, ‘정직’이다. 나는 이곳으로 떠나기에 앞서, 책과 방송을 통해서 코로나19와 싸우는 의사로 비춰졌다. 하지만 육아휴직 중인 지금은 결과적으로 그때 당시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사실이 아닌 긍정적 이미지 뒤에 숨고 싶지는 않다. 설사 그것이 나에게 명성을 가져다주는 것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더욱. 말하자면 “나는 지금 코로나19와 싸우고 있지 않다.”라고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코로나19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지금도 밤낮없이 일하는 보건소 직원들이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고생에 숟가락을 얹고 싶지 않다.


셋째,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사이고 보건소 직원이다. 코로나19 종식은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염원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다. 그리고 나는 코로나19 종식의 본질은 일상의 회복이라고 믿는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바 영국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모습은 우리가 일상의 회복으로 나가는 길에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이곳 영국 사람들도 아직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일상의 회복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되새기고, 혹여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불필요하게 제한하는 등의 일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그들의 성공적인 부분은 취하고 잘못된 부분은 버리면 될 뿐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기록, 정직, 희망이라는 세 가지 이유로 런던에서 보내는 시간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첫 번째는 그렇다 쳐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평가를 받게 될 영역이라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유라기보다는 바램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내가 하는 일을 두고 뭐라고 하는 이는 없다. 어쩌면 운 좋게도 내가 쓴 글과 사진이 민감한 이들의 시야에 들지 않은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바라건대 혹여나 뜻하지 않게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함에 있어서 미리 살펴 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원문: 내가 런던의 일상을 전하는 이유 - 신승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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