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 블룸스버리는 오랜 세월 동안 문학의 도시로 알려진 런던 안에서도 문인들이 많이 모여들기로 이름난 곳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가족이 지내던 건물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년에 집필 작업을 하던 곳이었고, 집 앞에 몇 발짝만 나서도 문 옆에 파란 원반이 붙어있는 집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영국에서 문 옆에 붙어있는 파란 원반은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장소를 의미하는데, 블룸스버리에서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장소란 유명한 작가가 살았던 생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의 등하교를 책임졌다. 학교까지는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비가 안 오는 날은 딸아이와 킥보드를 하나씩 타고 달려 갔기에 보통은 더 일찍 도착하곤 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오면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육중한 플라타너스들이 둘러싸고 있는 정원이었다. 우리 부녀는 그 정원 주변을 따라서 킥보드를 밀며 갈 길을 재촉했고, 그러다 보면 잠깐 사이에 첫 번째 차도에 도착했다.
바로 그 길 건너편에 또 한 명의 빅토리아 시대를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찰스 디킨스.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지금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어 있는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이 바로 그곳이다. 현재는 찰스 디킨스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박물관이라는 안내판이 아니라면 주변의 다른 집들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외관이 평범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기라성 같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중에도 이야기 구성이 탄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앞의 내용과 뒤에 나올 내용이 기발한 복선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 한 명 한 명이 허투루 등장하지 않고 나름의 중요한 성격과 역할을 갖고 있어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 이르러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연극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두 인물이 기억에 남는다. 뜨개질에 여념이 없는 아줌마로 등장해서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듯했던 드파르주 부인이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소설에서 가장 지독한 악인이었다는 점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별 비중이 없었던 소심남 시드니 카턴이 숭고한 인류애를 보인 인물로 거듭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마네트 부녀와 자르비스 로리 그리고 찰스 다네이처럼 언뜻 중요해 보이는 인물들은 잘 훈련된 엑스트라이고, 시드니 카턴과 드파르주 부인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격한 대립을 이루는 진짜 주인공일지 모르겠다. 비록 두 인물이 소설 전체에서 딱 한 번 서로 스치듯 지나갔을 뿐 물리적으로 직접 충돌한 일이 전혀 없었음에도 말이다.
이 소설에서 내가 제일 주목한 부분은 권력을 남용하는 귀족들과 거기에 저항해 혁명을 일으키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프랑스의 평민들을 억압하는 귀족들의 악랄한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혁명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무지성과 잔인성에 대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귀족들과 평민들이 빚어내는 일련의 작용과 반작용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들은 흔히 찰스 디킨스가 빈민들의 삶에 공감하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하지만, 적어도 『두 도시 이야기』에서 만큼은 빈곤과 결합한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파리 시민들이 마네트 박사를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편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는, 양심이 아닌 동질성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경우 모두 이성보다는 감성을 우선시하고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가 차지한 자리를 보전하는 것만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단두대가 자주 등장하며 희생자의 머리와 몸이 분리된 묘사가 자주 나온다. 나는 그 이유가 이 소설의 배경이 프랑스 혁명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와 몸을 끊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단두대는 혐오와 증오 그리고 복수로 이어지는 당시 귀족과 평민들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학 비전공자의 설익은 해석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시선을 현재의 우리나라로 돌려보자. 부자와 서민,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싸우는 우리들도 그들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서 마음을 닫고 자신들만의 입장을 목이 터지라 외치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저출산, 혐오, 원한이라는 단두대의 또 다른 이름들. 우리는 지금 스스로 그 단두대를 향해 성큼성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바라건대 우리의 목이 단두대에 놓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b%91%90-%eb%8f%84%ec%8b%9c-%ec%9d%b4%ec%95%bc%ea%b8%b0/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