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연제구 소식지 기고글
‘공유지의 비극’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남용되어 결국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상황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생물학자 개럿 하딘이 1968년 그의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목초지가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을 때 목동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많은 소를 풀어놓아 결국 목초지가 황폐화되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동체 전체의 자원 고갈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유지의 비극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건강보험은 전 국민이 의료 혜택을 공평하게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훌륭한 건강보험 제도 덕분에 고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큰 경제적 부담 없이 누리고 있다. 그러나 건강보험 자격 도용·부정수급 문제는 이 훌륭한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일부에서 다른 사람의 건강보험증을 도용하거나 명의를 빌려 부정하게 진료나 처방을 받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부정수급은 건강보험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고, 결국 모든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2021년에는 3만 2천605건의 부정수급 사례가 적발되었으며, 2022년에는 3만 771건, 2023년에는 4만 418건으로 그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개인의 일탈이 모여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5월 20일부터 병의원과 약국에서 신분증 확인을 의무화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병의원이나 약국을 방문할 때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모바일 건강보험증 등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병의원이나 약국에서는 환자의 신분증을 확인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 제도가 시행되고 나면 당분간 여러 가지 불편이 예상된다. 신분증 챙기는 것을 깜빡할 수도 있고 병의원이나 약국까지 애써 찾아갔다가 헛걸음하고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진료받으러 갔는데 이런 절차가 갑자기 막아선다면 화가 날 만하다. 당부컨대 그럴 때는 이 제도가 건강보험 제도라는 공유지의 황폐화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서로가 조금씩 이해하고 협조하다 보면 새로운 제도가 큰 혼란 없이 정착될 것이다.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 시작은 어쩌면 생각만큼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진료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 신분증을 챙겼는지 확인하는 작은 습관만으로도 건강보험 제도가 공정하게 운용되는 토대를 다질 수 있는 것이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b%b3%91%ec%9b%90-%ea%b0%88-%eb%95%8c-%eb%b0%98%eb%93%9c%ec%8b%9c-%ec%b1%99%ea%b2%a8%ec%95%bc-%ed%95%98%eb%8a%94-%ea%b2%83/ |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