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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록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by 신승건의 서재

모처럼 집 정리를 하게 되면 라면 상자에 넣어 둔 빛바랜 물건들을 다시금 꺼내볼 일이 있다. 철지난 수첩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수첩을 넘기다 보면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보통 수첩의 가장 뒷쪽 몇 장을 차지하고 있는 전화번호부다.


1990년 대 말부터 휴대폰이 대중화하면서, 사람들은 전화번호를 기억할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휴대폰에 연락처를 저장해 두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으로 검색하는 방식은, 전화번호부를 찾아서 일일이 번호를 누르는 것보다 훨씬 편리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휴대폰의 연락처에 저장해두기 시작했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가족의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되었다.


휴대폰이 대중화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또 다른 새로운 물건이 떠올랐다. 디지털 카메라였다. 휴대폰이 수첩의 전화번호부를 사라지게 한 것 처럼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과 종이로 된 사진을 사라지게 했다.


우리는 지난 20년 간 과거를 담는 사진과, 현재를 담는 연락처가 디지털화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디지털화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든든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 든든함은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내가 연락처를 찾고 싶을 때 언제든 휴대폰만 열어서 내게 익숙한 이름을 검색하면 전화번호가 저절로 불려 나오고, 내가 사진을 보고 싶을 때 언제든 파일만 열어보면 볼 수 있다는 생각. 말하자면 기억에 대한 통제감이다. 그 통제감이 우리에게 든든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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