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풍경화의 일부처럼 존재하셨다. 어머니가 집안의 공기를 활기차게 휘저으며 생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쪽이었다면, 아버지는 그 공기가 낮게 가라앉아 고요해지는 구석에 조용히 깃드는 분이었다.
소란스럽게 근육을 쓰기보다 거실 한구석에서, 혹은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정물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셨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등나무 아래 나무 벤치는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했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만약 내가 타인의 요동치는 파동에 억지로 몸을 맞춰야 하는 삶을 살았다면, 내 안의 연약한 실핏줄들은 진즉에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그 깊고 서늘한 고요가, 아무런 말 없이도 나를 긍정해 주는 그 정적이 늘 안온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요는 정체된 늪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나 밑바닥에서는 부지런히 자갈을 굴리며 흐르는 깊은 강물과 같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것은 당신이 통과해 온 구식의 시간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는, 혹은 새로이 도래하는 투명한 세계의 속도에 어떻게든 발을 맞추어 보려는 노년의 처절하고도 숭고한 몸짓이었다.
TV 화면 속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요리 박사가 나와 능숙한 손놀림으로 식재료를 다룰 때면, 아버지는 무심한 듯 서늘한 조언을 어머니에게 건네곤 하셨다. "저 미꾸라지를 그냥 통째로 넣으면 뼈가 씹혀서 못 써. 믹서기에 곱게 갈아서 추어탕을 끓여봐라." 혹은 "밖에서 파는 치킨은 기름이 미덥지 않으니, 집에서 깨끗한 기름에 직접 튀겨보는 게 어때."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신수현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