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기하는 시간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대략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10개월은 뱃속에서부터의 시간을 말한다. 그렇지만 잉태하기까지의 시간도 필요하다. 자연임신이 아닌 과학의 힘으로 아기를 갖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다.
태어나면서 아이를 위해 이벤트를 기념한다. 100일, 첫돐, 생일등, 아이가 건강하게 커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는 아이가 성장할때까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된다.
아이는 갑자기 생길수도 있지만, 생기는 순간부터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지만, 죽음이란 것은 갑작스런 사고로 이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한채 떠나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죽음은 갑작스레 다가오기도 하지만, 투병으로 인해 죽음의 시간이 예정되어있기도 하다. 그래서 탄생과 같이 죽음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을 겪으셨다. 내가 고3 졸업을 안둔 며칠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눈은 뜨고 있지만, 눈의 생명이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그때, 난 아무이유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수술도 시켜주지 않으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골에서 올라왔다가 무시한다고 투덜거리던 엄마의 불평이 조금 안스러웠다. 그래도 우리집은 좀 산다고 하는 집이였는데...
엄마는 수술받다가 죽어도 좋으니 수술시켜 달라고 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주위에 뇌출혈로 수술받으신 분들을 보면,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분도 많은데, 아버지는 수술하시고 걸어다니실 정도였다. 시골집으로 내려가 6개월간 투병생활을 하셨지만, 정상적인분들과 달리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나이 55세였다.
20여년이 지난후, 아버지의 몸은 급격히 노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팡이의 도움으로 걷게 되시고, 그다음에는 휠체어를, 그다음에는 침대에서 돌아가실때까지 누워계셨다.
나는 주위에 죽을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투병중이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웬지 쉽게 죽을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드라마나 영화에선 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생명이 붙어있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고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3년전부터 엄마는 나를 시골로 자주 부르셨다. 난 경제적인 이유로 아버지에 화가 나 있었고, 5년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하다가 시골에 갔는데,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가 누워계셨고, 난 그런 아버지가 낯설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마지막이라며, 이번해를 못넘길거 같다고 자주 불렀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물론, 나는 자주 뵙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오래 오래 살아계실것 같았기 때문이다.
꼼꼼하시던 아버지, 영수증을 챙겨오지 않으면 엄마에게 불호령을 내시던 아버지, 건강보험료가 지난달보다 다르게 나오면 공단에 전화해서 큰소리 치시던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3년동안 누워계시면서 수전노처럼 모아두었던 현금을 간병하는데 다 사용하셨다. 재산에 대해서도 정리도 못하시고 돌아가셔서 상속문제로 머리가 아팠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던 그 시기에, 앙상한 팔을 들어올리려고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안아주시려고 했던 것인데, 난 안아드리지 못했다.
죽음이란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와 그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또다른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후회라는 지옥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함께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변하지 못한채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같이 있어 드리지 못한 시간에 대한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은, 아이를 맞이하는 시간만큼 소중하고 값지다. 그래서 평생 미워하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는것조차, 세상과의 이별이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후회가 되지 않도록,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 남겨진 가족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다.
나처럼 3년이라는 아버지와 함께 보낼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음에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시간이 나에게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