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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의 철학, 커피에서 배운다

차이를 인정하는 삶 (갈등은 차이에서 시작되고 화해는 인정에서 비롯된다)

by 신수현

2016년, 용인에서 화성으로 이사했다. 화성에 도착한 첫날,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시원했다. 서해안과 가까운 덕분에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낮의 뜨거운 열기도 밤이 되면 가라앉았다. 같은 경기도이지만 용인과의 여름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더운 공기가 정체된 사무실에서는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야 했지만, 집에서는 밤바람 덕분에 냉방기를 가동할 필요가 없었다. 같은 계절, 같은 시간 속에서도 장소에 따라 온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문득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온도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남과 여, 대표와 근로자, 선생과 제자.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도를 비교하고 때로는 충돌한다. 우리는 종종 상대의 차가운 면을 보며,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며, 성격이 불같은 사람을 보면,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며 관계를 규정짓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차가우면 창문을 닫고 더우면 창문을 열면 그만인 것을, 우리도 상대의 온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


갈등은 차이에서 시작되지만, 화해는 인정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고,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겨울이 오면 두꺼운 외투를 챙기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차가운 공기를 즐기며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닌다. 여름이 와도 더위를 못 느끼고 가디건을 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만 더워도 견디기 힘들어부채질을 해가며, 구취와 암내를 유발하는 사람도 있다. 온도를 느끼는 기준이 다 다르듯, 사람마다 생각하고 반응하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갈등이 시작된다. “넌 왜 이렇게 느려?” “넌 왜 이렇게 예민해?” “넌 왜 그렇게 둔하니?”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방을 평가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한다. 하지만 기온이 오르면 창문을 열고, 바람이 차가워지면 문을 닫듯이, 상대의 온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온도를 바꾸려 하기보다, 그 온도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커피를 생각해 보자. 커피 열매는 처음엔 노란색, 초록색, 익으면 붉은색으로 변한다. 생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맛도, 향도 없다. 하지만 이 열매에 열이 가해지면 더 단단해지고, 고유의 쓴맛을 갖게 된다. 로스팅을 거친 후 가루가 될 때 비로소 커피의 진정한 향과 맛이 발현된다. 이 과정에서 커피는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달라졌다고 해서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연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성장하고, 때로는 힘든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차가운 시련을 겪고 단단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뜨거운 경험을 통해 더욱 깊이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힘겹다고 해서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깊고 풍부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커피는 뜨거운 물에도, 차가운 물에도 잘 녹는다. 다른 차들이 특정한 온도에서만 맛을 내는 것과는 다르게, 커피는 극단적인 온도 속에서도 본연의 역할을 잃지 않는다. 뜨거운 물을 만나면 깊고 진한 맛을 내고, 차가운 물을 만나면 깔끔하고 산뜻한 맛을 낸다. 환경이 달라져도 커피는 커피다. 우리는 커피처럼 다양한 온도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때로는 인생이 우리를 가루가 되도록 빻아버릴 때도 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커피가 가루가 되면서도 최고의 향과 맛을 내듯이, 우리도 그 과정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변화는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흩날려도 결국 어딘가에 내려앉아 또 다른 꽃을 피우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다양한 온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온도 속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는 차갑고, 누군가는 뜨겁다. 누군가는 빠르고, 누군가는 느리다. 하지만 그 차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를 바꾸려 하기보다, 각자의 온도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온도 속에서 살아간다. 그 온도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삶의 순간순간을 받아들이고,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피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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