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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자작시
by
신수현
Apr 6. 2025
터
처음으로 어버이날을 배우던 1학년 교실
붉고 진한 색종이를 모아 카네이션을 만듭니다
가위질이 서툴러 삐뚤빼뚤하지만,
삐뚤빼뚤 하기에 카네이션에 더 가깝습니다
흔들리는 바람에 망가질까 작은 가슴으로 품고 오는 나를 보며,
아버지 말없이 미소 지으십니다
지금은 아버지 앞에, 하얀 국화꽃이 쌓여 갑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국화꽃인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으십니다
하얀 국화꽃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를 가지고 막걸리를 받으러 갑니다
내 어깨보다 큰 주전자에 넘칠 듯이 팔랑이는 막걸리를 들고 오면
막걸리 거품이 주둥이를 통해 뛰쳐나오려고 합니다
한쪽 다리엔 막걸리가 흘러내리고,
작은 나의 두 손바닥은 빨갛게 달아 오릅니다
작고 가벼운 소주를 마시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는 소주는 비싸다며,
막걸리 심부름으로 나를 힘들게 합니다
아버지는 비싸다던 소주를
아버지 친구들은 아버지 없이도 마셔댑니다
막걸리 술안주로 김치면 된다고 하시는 아버지
그렇지만, 찢겨진 소고기가 들어간 육개장과
수북이 쌓인 수육으로 안주를 삼는 아버지의 친구들은
저는 야속하기만 한데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으십니다
재잘거리고 밥을 먹으면 밥알 튄다고
조용히 먹으라던 아버지
그렇지만 시끄럽게 먹고 있는 아버지 친구들에게
아버지는 말이 없으십니다
울음이 멈춘 뒤, 나즈막 들려오는 한숨과 침묵들 뒤에
아버지 친구들이 상을 비우고 울기 시작합니다
떠나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데, 우는 시간은 끝이 정해져 있나 봅니다
육개장과 수육이 식어가고, 국화꽃의 향기도 어둠에 묻혀지면,
아버지와 나, 자리를 비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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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멈춘듯, 흐르지 않는 어둠과 함께 ... 시간에 대한 후회, 반복되는 상처로 인해 글은 저의 치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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