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들고 다니며 지적 허영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대학생만이 가진 특권일지도 모른다. 회사 술자리에서 "왜 문명의 시초지인 아프리카가 유럽에 뒤쳐졌는가?"라는 주제로 부장님과 토론하려고 하는 용자(勇者)는 많지 않다. 하지만 나의 대학시절은 좀 달랐던 거 같다. 쿨하지 못한 지적 허영을 포기하고, 더 쿨하지 못한 인적 허영에 집착했으니 말이다.
무엇이 시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방송인 박경림 씨의 결혼식에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는 사실이다. 20대 청년의 패기인지, 철 모르는 애송이의 오만인지, 그땐 성공한 방송인인 박경림 씨를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했던 거 같다. 아무튼, 아는 사람의 수를 인간관계의 폭이라 착각하며, '숫자'에 집착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추석 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연락하느라 오전을 다 보낸 적도 있었다.(그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손발이 오그라 든다) 약속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스케줄러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어깨를 으쓱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당시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모임을 쫓아다니기까지 했다. 결국 '7월 20일에 태어난 사람들의 모임'까지 참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적 허영을 인정하고 쓸모없는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요샛말로 '현타'가 왔다고 해야 하나.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이다. 우선,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기준은 내 마음이다. 그들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지, 즐거움을 주는지, 유익함을 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만나고 싶어서 만날 뿐이다. 다음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도움은 정신적일 수도 있고, 지적일 수도 있으며, 재정적일 수도 있다. 여럿이 해야 하는 운동을 할 때 수를 채우는 가벼운 도움일 수도 있다. 도움의 시점도 유연하다. 당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미래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이런 관계는 도움을 주고받는 역학관계가 사라진다면 끊어지게 된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한시적 만남일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업무적으로 얽힌 사람들이나 혈연관계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당위적 관계로 시작하지만, 만나고 싶은 관계, 혹은 도움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이유를 찾는 건 어찌 보면 각박한 생각이다. 서은국 교수(행복의 기원 저자)의 말처럼 행복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남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좋아하지만 성장 욕구도 충만한 사람에게, 만남은 항상 선택의 문제이며 시간의 문제이다. 람보르기니와 같은 폭발력을 지닌 이십 대에는 사람과 성장, 둘 다 욕심을 부릴 법하지만, 하룻밤을 새우면 이틀을 쉬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의미가 없는 만남은 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국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남게 될 터인데, 지금보다 풍족해진 시간을 행복으로 채워줄 만큼 풍요로운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디에 가나 반가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공적인 인생이다." 어릴 땐 지겨워하던 어머니 말씀이 지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걸 보니,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