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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할 용기, 제인 구달

by 날큐

'성장'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성공'은 그렇지 않다. 성공은 한껏 흔들어 놓은 샴페인처럼 그동안의 노력을 응축해 놓고 있다가 뚜껑이 열리는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영광의 순간이 지나면 샴페인 병은 텅 비워지며 몸과 마음이 지치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샴페인이 터지는 '운명의 순간'이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제인 구달에게는 한 잡지 기사가 그랬다. 1963년 『내셔널지오그래픽』 8월호가 정기구독자에게 발송되며 제인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박사 학위가 없는 스물아홉 살의 보조 연구원은 순식간에 저명한 과학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침팬지와 대비되는 매력적인 외모로 '정글의 공주'라는 닉네임까지 얻게 되었다. 수많은 편지가 세계 곳곳에서 날아들며 제인을 만나기 위해 유력인사들이 곰베에 방문하고자 하였다.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유명세는 제인이 원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녀가 커리어를 이어가는데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덕분에 그녀는 연구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고 침팬지 연구의 폭과 깊이를 더 할 수 있었다. 커리어 후반에 환경운동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제인 구달'이라는 이름값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제인은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위대한 발걸음은 수년 전 찾아온 두 번의 기회에서 시작되었다. 제인은 무모해 보였던 도전들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당시 사회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에게 요구하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용기. 이것이 바로 제인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 침팬지들의 삶을 바꿔놓은 그녀의 무기이다.


첫 번째 기회는 '클로'라는 친구의 편지 한 통이 발단이었다. 아버지가 케냐 나이로비에 농장을 매입해 자기도 그곳에 가게 됐으니 제인도 반년쯤 머물다 가는 게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당시 제인은 짧은 비서 생활을 끝내고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에 그럭저럭 적응했고 런던 생활에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지만 제인은 용감하게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몸을 실는다. 두 번째 기회는 케냐에서 찾아온다. 케냐 생활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제인이 상상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의 꿈은 훨씬 야성적이고 거칠고 근원적인, 자연과 동물에 가까운 아프리카에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 리키'라는 인물은 제인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적임자였다. 제인은 용감하게 리키에게 전화를 걸어 향후 스승이자, 평생의 조력자가 될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된다.


두 번 모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어린 여자 혼자 아프리카에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루이스 리키는 이름이 알려진 과학자였지만 소문난 바람둥이로, 얼마 전 조수와 스캔들이 있었던 위험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꿈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에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물행동학을 연구할 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인내심이다. 겸손한 다윈조차 자신의 강점이라고 밝혔던 유일한 자질이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다려야 한다.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제인의 시작도 그랬다. 제인이 곰베에서 보낸 첫 주 그녀는 새벽부터 밤까지 침팬지를 쫓아다녔고 아침에 잠에서 깬 침팬지들을 보기 위해 숲 속에서 침낭을 깔고 잤다. 그 후로도 제인은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관찰을 지속했으며 밤늦게까지 현장일지를 썼다. 제인의 위대한 발견은 이런 과정 속에서 나왔다. 침팬지도 반할만한 제인의 끈기는 분명 타고난 부분도 있었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했기에 발휘된 자질이다. 그 일을 좋아하기에 성과 없는 기다림을 버텨낼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더 많다. 제인도 커리어 중반 이후로는 침팬지와 함께 하는 행복을 동료들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를 위한 재원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순수 연구는 결국 돈 싸움이다. 돈이 있어야 침팬지를 연구하고 나아가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 그래서 제인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글을 쓰고 살인적인 강연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원하지 않는 촬영도 해야 했다. 제인은 수십 년째 이러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침팬지를, 더 나아가 동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속가능성. 이것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의 첫 번째 장점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유인원 현장연구에는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살인적인 더위와 성가신 벌레에 시달리게 된다. 그나마 귀찮은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자칫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니까 말이다. 더 무서운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독을 품은 수많은 종류의 뱀들, 들소, 표범, 심지어 사자와도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 전염병도 연구자들을 힘들게 한다. 곰베로 떠나기 전 맞은 여러 종류의 예방접종이 무색할 정도로 병에 걸리는 경우는 흔하다. 약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심할 경우 도시로 나와서 요양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위협적인 것은 곰베의 험준한 지형이다. 실제로 제인이 아끼던 직원인 루스가 실족사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려움은 자연환경에 그치지 않았다. 성차별도 심했다. 당시 곰베에는 특이한 규정이 있었다. 유럽 여자는 혼자 곰베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제인은 영국에 있는 엄마를 모셔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인들과의 관계도 문제였다. 나중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처음에 그들은 공격적이었다. 심지어 제인 모녀를 정부의 첩자라고까지 생각했다. 치안도 심각했다. 한 번은 무장한 괴한들이 연구원들을 납치한 적도 있었다. 인질극을 벌이며 돈을 요구한 것이다. 네 명의 학생이 감금되어 있던 사십 여일 동안 제인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연구 캠프는 존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제인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침팬지를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극복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은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인은 동물행동학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다. 정규 과학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포니테일 머리의 젊은 여자가 이루어낸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찬사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제인은 침팬지를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을 전체가 아닌 하나의 개체로 받아들인 최초의 과학자이다. 몰래 숨어서 관찰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그들과 동화되며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여 야생 유인원의 행동,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그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쌓은 것도 바로 그녀였다. 또한 침팬지가 육식을 하며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문서화한 것도 제인이 처음이었다. 스승 리키가 말했다고 한다. "인간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하겠군." 침팬지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루어내기 어려운 업적이다.


50대에 접어든 제인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세계를 떠돌며 침팬지, 더 나아가 야생동물들을 보호하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두 가지이다. 실험실에 갇힌 침팬지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하나, 아프리카에 있는 침팬지들을 밀렵꾼들에게서 보호하는 것이 둘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굴지의 기업들을 변화시키고 아프리카에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힘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시선도 바꿔야 했다. 단기간에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제인은 아흔이 넘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살인적인 비행 스케줄을 감내하며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 기업인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제인의 메시지는 점차 과감해지고 있다. 동물보호운동을 넘어 저소득국가의 어린이들을 위한,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와 동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것이 현재 제인의 관심사이며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다. 닭이 알을 낳는 것을 보고 싶어서 다섯 시간이나 닭장 속에서 기다리던, 《타잔》과 《두리틀 선생》 시리즈를 읽으며 아프리카에 가는 것을 상상하던 어린 소녀의 꿈은 어느덧 이렇게 커져버렸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제인이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인의 두 번째 샴페인은 아직 터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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