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내에게 물었다. "루이비통이 위야? 샤넬이 위야?"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나다운 질문이었다. 아내가 답했다. "루이비통은 명품이고 샤넬은 샤넬이야." 최고의 찬사였다. 샤넬은 샤넬 그 자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은 확고했고 지금도 여전히 견고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창업자이자 브랜드 그 자체인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있다.
샤넬은 선구자였다. 과학으로 치면 아인슈타인이나 뉴턴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성복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실용적이고 편안한 스타일로 여자들을 족쇄와 같은 그녀들의 의복에서 해방시켰다. 샤넬의 은혜를 입은 그녀들은 내장까지 꽉 조이는 코르셋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사회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인조 보석을 활용한 커스텀 주얼리 시장을 개척한 것도 샤넬이었다. 이제 보석은 더 이상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마릴린 먼로가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라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샤넬 NO.5도 그녀의 작품- 조향사는 따로 있었다 -이었다. 이 향수는 샤넬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이렇게 샤넬은 부와 명성을 모두 거머쥔 여자가 되었다. 여성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샤넬은 모든 여자들이 자신처럼 꾸미기를 원했다. 그녀의 클론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모조품에 너그러웠다. 그녀에게는 가품 생산을 막아 돈을 더 버는 것보다는 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가짜 샤넬을 허용해야 했다. 이런 면에서 샤넬은 성공한 듯하다. 그녀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의 거의 모든 여자들은 샤넬을 갖고 싶어 하니 말이다. 어쩌면 그녀들이 진짜 갖고 싶은 것은 샤넬의 시크한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샤넬의 꿈이 현재진행형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은 샤넬은 사실 열등감 덩어리였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사람들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 일쑤였다. 특히, 아버지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불행한 과거를 미화하여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으로 바꾸는데 샤넬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전기작가들에게도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꾸며내곤 했다. 그러다가 작가들이 사실에 접근하려고 하면 소송을 걸어 출간을 막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샤넬은 엄격했다.
그렇다고 해서 샤넬이 자신의 결점- 어디까지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을 숨기는데만 급급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샤넬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그녀만의 무기로 바꾸어 나갔다.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녀의 신체적 결점은 샤넬을 현대 여성복의 창시자로 만들었고 당시 남성들의 속옷에나 쓰던 값싼 옷감인 저지를 시크한 여성용 소재로 탈바꿈시켰다. 뿐만 아니다. 자신의 모자란 점들을 주변 인물들의 강점을 흡수하며 바꿔나갔다. 그녀는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샤넬은 무책임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흥과 쾌락을 향해 떠날 궁리만 하는 남자와의 결말은 뻔했다. 헌신적인 내조는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연하게도 아내를 잃은 샤넬의 아버지는 딸 셋을 모두 수녀원에 버린다. 수녀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샤넬은 그곳에서 나온 후로는 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가수에 도전하기도 하였는데 재능이 크게 없었던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엔티엔 발장이라는 부유한 퇴역군인이었다. 샤넬은 '코코트'라는 신분으로 그의 별장에 살게 되는데 코코트는 지금으로 치면 정부나 고급 매춘부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코코트는 당시 흔한 관행(?)이었고 사회적 신분이 낮고 외모가 뛰어난 여자들에게는 괜찮은 선택지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샤넬은 발장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샤넬의 굴곡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몸매는 당시 사회가 선호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샤넬은 엔티엔의 별장에서 사는 풍만한 여자들 사이에서도 빛났다.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가 여학생이나 톰보이 스타일로 꾸몄을 때 가장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샤넬은 발장의 옷장에서 남자 셔츠를 꺼내 입고 양복점에서 남성 승마복을 사서 입기도 하였다. 다른 여성들처럼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걸터앉아 말을 타지도 않았다. 남자들처럼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탔다. 당시 샤넬이 말했다고 한다. "(말을 탈 때는) 소중한 불알 두 짝을 차고 있다고 상상해야 해요. 그 위로 몸무게를 싣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샤넬의 파격적인 복장 중에서도 특히 밀짚으로 만든 작은 모자에 별장의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녀들이 앞다투어 샤넬의 모자를 써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엔티엔 발장은 모자를 만들어서 팔아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초기자금을 댄다. 이것이 세계적인 기업 샤넬의 시작이다. 샤넬은 모자에서 시작해 여성복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 간다. 샤넬이 옷을 만드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었다. 당시 화려하고 불편한 여성복들 사이에서 샤넬의 시크하면서도 편리한, 마치 남성복 같은 옷은 매력적이었다. 갈비뼈를 으스러뜨리는 속옷을 입으며 자랐던 여성들은 그녀들의 코르셋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샤넬의 옷을 입었다. 그렇게 현대여성복은 시작되었다.
'저지'라는 옷감을 여성복에 도입한 것도 철저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저지로 만든 드레스는 날씬한 여성에게 어울렸다. 당시 선호되던 풍만한 여자들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게다가 저지 드레스를 입으면 코르셋을 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샤넬에게 유리한 옷이었다. 결국 여자들은 샤넬의 옷을 입기 위해 코르셋을 내면화해야 했다. 다시 말해 살을 빼야 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혹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신분적 배경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배웠다. 주변사람들의 강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는 자신감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오히려 자존감이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샤넬의 인생은 크게 두 챕터로 나뉜다. 누군가의 후원을 받던 시기와 누군가를 후원하던 시기이다. 그녀는 후원자이던 그녀가 후원하는 사람이던 상관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배웠다. 배움에 있어서 샤넬은 흡혈귀와 같았다.
샤넬의 남자들의 면모는 대단했다. 부르주아 엔티엔 발장으로 시작해 진보 성향의 지식인이자 대부호 기업가였던 보이 카펠, 러시아 황실 출신의 드미트리 대공, 가난하지만 뛰어난 시인이었던 르베르디, 누구보다 부유했고 윈스턴 처칠과도 친구이기도 했던 웨스터민스터 공작(이하 벤더) 등 다양하면서도 배울만 한 부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았다. 샤넬의 성장에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인생 초창기 샤넬은 그녀의 신분이 높고 부유한 애인에게서 상류층의 생활을 익혔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떤 예절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배워나갔다. 그리고 이때 익힌 살아있는 지식은 그녀의 천부적인 감각과 어우러지며 샤넬이라는 작은 모자가게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샤넬이 가장 사랑했던 보이 카펠은 그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은 바로 '브랜딩' 기술이었다. 카펠은 메시지를 매력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 상품, 더 나아가 그 상품을 만든 사람 자체에 대한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다. 샤넬은 그와 함께 한 기간 동안 그의 무기를 흡수해 나갔다. 그리고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매혹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벤더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하루는 그가 샤넬에게 보석함을 선물했는데 고가임에도 겉이 에나멜로 입혀져 있었다. 하지만 속은 순금이었다. 샤넬은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배운다. 가장 귀한 면을 은은하게 보여주는 '숨겨진 호사스러움'. 이것이 진정 고급스러운 것이구나! 샤넬은 훗날 단순한 트렌치코트 안쪽에 호화로운 모피를 숨겨두거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울 재킷에 실크를 안감으로 대는 등 벤더로부터 얻은 교훈을 훌륭하게 응용한다. 드미트리 대공은 보다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샤넬은 그를 통해 러시아 황실의 사치스러운 보석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샤넬의 주축이 되는 '주얼리' 부문을 탄생시킨다. 샤넬의 트레이드마크인 여러 겹으로 감은 진주목걸이도 이때 드미트리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놀랍게도 진품이라고 한다 -.
엄청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샤넬은 이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누군가를 후원하기 시작한다. 특히, 젊은 예술가들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이로 인해 당대 최고였던 예술가 무리와 어울리게 된다. 그 면모는 화려했다. 무려 파블로 피카소, 프랑스 극작가이자 시인 장 콕토,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이 모두 샤넬의 후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 샤넬은 이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간혹 일을 같이 하며 배움의 길을 넓혀 간다.
샤넬의 끊임없는 상승 욕구는 그녀의 결핍에서 온 듯하다. 비록 그녀의 숙원이었던 상류층과 결혼하여 신분을 탈바꿈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녀는 결국 모든 여자들의 '워너비'가 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죽고 '칼 라거펠트'라는 개성 강한 후계자가 샤넬을 이끌었음에도 그녀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세계 어디를 가던 세련된 여자들의 옷차림에서 우리는 샤넬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복제된 코코 샤넬을 볼 수 있다. 이 정도면 샤넬은 만족할까? 아마 흡족해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녀의 끝없는 성장에 대한 갈망을 감안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