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큐 Oct 06. 2024

세상을 바꾼 반골기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근무 중에 한 딴짓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것도 두 개나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땡땡이는 수백 년간 물리학계를 지배하던 뉴턴의 고전역학에 도전장을 던지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고 사고의 영역을 3차원에서 4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그의 업적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 (우리는) 거시적 수준에서는 그의 상대성 이론으로 정의되고, 미시적 수준에서는 양자역학으로 정의되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일들이 늘 그렇듯, 아인슈타인의 발견도 운과 실력이 힘을 합친 결과였다. 광양자와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던 시절 그는 특허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천재의 대명사인 그에게는 다소 엉뚱한 직장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특허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은 그와 잘 맞았다. 덕분에 그는 하루의 일을 한 시간에서 세 시간이면 마칠 수 있었다. 게다가 상사가 너그러웠다. 책상 위에 종이를 잔뜩 늘어놓았다가 사람들이 다가가면 황급히 서랍 속으로 감춰버리는 것을 눈 감아주었으니 말이다.



          노벨상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상금 전부가 당사자가 아닌 그의 전처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첫 번째 노벨상을 받기 수년 전 - 이혼은 1919년, 노벨상은 1921년(실제 수상은 1922년)이었다 -, 당시 아내였던 마리치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자신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텐데, 만약 자신과 이혼해 준다면 그녀에게 상금을 모두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뢰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믿었던 듯하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는 과정에 있었다. 그의 논문은 내용이 파격적인 데다가 철저한 고증을 선호하는 노벨상 위원회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때문에 논문이 발표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인슈타인은 상을 받게 된다. 신기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상을 받지 못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정작 초조해하는 쪽은 노벨상 위원회였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이 수상을 하지 못하면서 노벨상 자체의 위상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게 진정한 권위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은 아주 늦게 말을 배웠다. 하녀는 그를 멍청한 아이라는 뜻으로 '데페르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대학 입시에 한 번 실패했고 졸업생 5명 중에 4등으로 졸업했다 - 시험 성적은 좋았지만 졸업논문에서 저조한 점수를 받았다 -. 심지어 수학 교수에게 '게으른 개'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그는 졸업 후 5년이 지나서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에 임용되기까지는 무려 9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 그를 제외한 동기들은 졸업 후 곧바로 교수가 되었다 -. 그래서 그는 특허사무소에 취직해야 했다. 그마저도 친구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한 마디로 낙하산이었다. 기적의 해 - 아인슈타인이 세상을 바꾼 논문 5편을 발표한 해 -라 불리는 1905년의 논문들도 사실은 거창한 목표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박사학위를 따서 특허사무소 3급 심사관에서 2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이런 면은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대체 무엇이 평범해 보이는 천재의 삶 속에서 위대함을 만들어냈을까? 그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에게는 연필 한 자루 없이도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를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사고실험'이라고 한다. 상상 속에서 그는 빛의 속도로 움직였고 4차원의 세계를 거닐었다. 원자들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진 상자를 관찰했다. 굽은 우주를 그려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상대성이론이 탄생하였고 광양자설도 세상에 나왔다. 그에게 실험실은 필요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하면 그만이었다. 이 정도면 딴짓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찾아올 여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산책을 즐겼고 호수에 보트를 띄워놓고 사색을 하기도 하였다. 바이올린 연주에도 능했는데, 그는 생각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어려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음악에서 위안을 얻고 길을 찾았다. 또한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철학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특히 데이비드 흄의 경험주의는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내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나는 누구나 사고실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양질의 휴식과 음악, 철학 등으로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힐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 4차원의 공간을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시간씩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런 멋진 두뇌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인슈타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사고실험 못지않은 무기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인슈타인을 만든 진짜 무기는 천부적인 두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아인슈타인은 거창한 도전을 하기로 한다.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통합한 하나의 이론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대담한 시도는 박사학위도 따지 못한 백수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보인 행보의 전조와도 같았다. 통일장 이론 -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합하고자 하는 이론 -에 집착하며 인생의 후반부를 보냈으니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물리학의 주요 이론들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기존 이론들의 허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해당 이론을 만든 거장들에게 직접 편지로 보내거나 논문으로 발표했다는 점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 불리던 볼츠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볼츠만의 열역학 제2법칙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참 대단한 배짱이다. 어쩌면 세상물정을 모를 정도로 순수했을지도 모른다 - 그의 일생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



          아인슈타인의 이런 모습은 200여 년 전 물리학을 지배했던 또 다른 천재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바로 아이작 뉴턴이다. 만약 뉴턴이 살아생전에 아인슈타인을 만났다면 그다지 친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가발에 정복을 입은 근엄한 표정의 뉴턴이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에는 장난기를 한껏 머금고 있는 아인슈타인과 어울리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건방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그랬다. 뉴턴은 명성을 얻기 전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인 하위헌스와 자신을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고대의 철학자들까지도 비판하였다. 그러고는 미안했는지 이런 메모를 남겼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렇다. 두 천재에게는 누구든 졸(卒)로 볼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들에게 권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연을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법칙을 찾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렇게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다. 뉴턴은 과학의 기틀을 마련했고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만든 그 견고한 상자 밖으로 인류를 끄집어냈다. 이 모든 것들은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듯도 하다. 권위란 현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이고 위대함은 항상 현재를 넘어서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위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뉴턴은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권위에 기대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은 상당히 권위적이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권위를 혐오했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이 같은 모습은 그의 삶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후에도 소박한 집에서 살았다. 그에게는 연필과 종이를 놓을 수 있는 커다란 목재 테이블과 편안하게 앉아 노트에 글을 쓸 수 있는 안락의자만 있으면 충분했다. 강연을 하러 다닐 때는 1등석보다는 3등석을 선호하였다. 그는 심지어 동네 아이들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아인슈타인이 그 대가로 받은 것은 집에서 만든 물렁물렁한 사탕이었다.   



          권위를 싫어하는 마음은 '인간' 아인슈타인을 편안하고 소탈하게 보이게 했지만 '학자' 아인슈타인은 반항아로 만들었다. 그는 물리학의 통념에 대항했다. 그는 기존의 이론이 자신의 생각과 모순되면 자신의 생각이 아닌 기존의 이론을 먼저 의심했다. 진리 앞에서 격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진리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례함 만세!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오."



          이렇게 그는 뉴턴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틀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뉴턴이라는 인물은 위대했고 그가 물리학계에 남긴 잔상은 짙었다. 사실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광양자설이나 상대성이론 모두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될 수도 있었다. 광양자설에 먼저 가까이 간 것은 막스 플랑크였다. 하지만 보수적이었던 플랑크는 뉴턴이 만든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오히려 자신이 밝혀낸 수학적 결과를 고전역학에 끼워 맞추려고 하였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플랑크의 발견에 새로운 물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광양자설은 프랑크가 아닌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 주었다. 플랑크는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오랫동안 물러서 있었다는 사실을 후회했다고 한다. 아이작슨은 이를 멋지게 표현하였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숯불에 바람을 불어넣어서 고전 물리학을 태워버리는 숯불로 만들었다." 상대성이론도 마찬가지였다. 푸앵카레와 로렌츠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상당히 접근했었다. 그들도 새로운 물리학의 개척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수백 년간 물리학을 지배한 뉴턴의 굴레에서 벗어날 담대한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지배자와 추종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지배자였다.



          그랬던 아인슈타인도 나이가 들며 변해간다. 물론 '인간' 아인슈타인은 아니었다. 여전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학자'로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초석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푸념하듯 말했다. "운명은 권위에 저항했던 나를 벌하려고 나 자신을 권위로 만들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또한 아인슈타인의 저항자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이미 양자역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인슈타인은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리적 실재를 확률로 정의하는 양자역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고독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이 옹호하는 양자역학에 맞서 결과적으로는 불가능했던 통일장 이론을 만드는 데 매진했으니 말이다.



          '아인슈타인 대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물리학자들'의 대결 구도는 제2차 솔베이회의에서 정점을 이룬다. 기념사진에 등장하는 인물 전부가 노벨상 수상자이거나 향후 노벨상을 받게 될 사람들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한 바로 그 회의이다. 당연하게도 아인슈타인은 닐스 보어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거의 돌림매 수준이었다. 수세에 몰린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사망하자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기괴한 일을 벌인다. 그는 부검을 하던 중 아무런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전기톱으로 아인슈타인의 두개골을 절개해서 뇌를 꺼낸다. 그리고 천재의 뇌를 약품 속으로 넣는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하기 어렵겠지만 유족들의 반발에도 천재의 뇌는 그의 소유가 된다 - 심지어 그는 남은 뇌 조각을 마음에 드는 연구자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한다 -. 아마 그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해 무언가를 밝혀 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논문은 발표되지 않았다.



          이 미치광이는 무언가를 착각했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과 대등한, 심지어 그보다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이들은 늘 있었다 - 물론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아인슈타인이 이뤄낸 일들을 해낼 수 없었다 - 뉴턴은 제외해야 할 듯하다 -.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 말이다. 그 병리학자는 차라리 아인슈타인의 뇌 대신에 심장을 꺼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나는 초인적인 두뇌와 함께 반항적인 기질이 천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두뇌를 탐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의 정신은 따라 해 볼 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천재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그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일 듯도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