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보르헤스와 같은 듯 다르다.
우선 공통점이다. 두 천재는 모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높은 신분의 가문은 아니었지만 평생 돈 걱정 없이 글쓰기에 매진할 정도로는 부유한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비슷하다. 괴테의 부친은 가정교사를 들여 아들을 교육시켰고 보르헤스의 아버지는 한 술 더 떠 자식 교육을 위해 유럽에서 수년간을 보내기도 했다. 박학다식하다는 점도 닮았다. 괴테는 문학 이외에도 과학과 철학, 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뉴턴의 광학을 반박한 색채론은 훗날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르헤스도 만만치 않다. 그는 백과사전을 끼고 살 정도로 다양한 지식을 추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형이상학적인 상상을 이어 나간다. 결국 두 독서광은 작가를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다른 점도 많다. 보르헤스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50대에 알려진 대기만성형이었지만, 괴테는 20대에 출간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하 《베르테르》 - 한 권으로 단숨에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문체도 다르다. 보르헤스가 간결하고 짧은 글을 선호했던 것에 반해 괴테는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한 장편소설을 주로 썼다. 활동의 범위도 달랐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독서와 글쓰기로 보낸 보르헤스와는 달리 괴테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괴테의 외모와 언변은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생 수많은 연애를 하였으며 사랑의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반면 보르헤스는 평범한 얼굴과 수줍은 성격으로 여자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심지어 68세에 처음으로 결혼을 한다. 이는 작품의 주제로도 이어진다. 보르헤스의 단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도서관에 처박혀 책과 함께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심오한 생각을 써 내려간다. 반면 괴테는 보르헤스와는 달리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주로 집필하였다. 이 지점이 작가로서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책 속의 지식을 사랑한 보르헤스와는 달리 괴테는 현실 속 살아있는 경험에 무게를 더 두었다. "나는 경험한 것만 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작품 속에 깊이 녹여냈다. 괴테의 초기 작품이자 그를 스타로 만들어 준 《베르테르》도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재창조되었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친구의 죽음이었다. 과거 동료였던 빌헬름이 사랑의 아픔으로 자살한 사건에서 괴테는 충격을 받는다. 동시에 위대한 영감을 받는다. 작품 속 '베르테르'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도 괴테의 친구처럼 자살을 선택한다.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로테의 모델도 괴테의 정신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사를로테 부프'이다. 작품 속 '로테'와 같이 그녀도 약혼한 상태였고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괴테는 상실과 절망을 느끼게 되고 이는 소설 속 '베르테르'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괴테를 거쳐 간 수많은 여자들은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로마 비가》는 크리스티아네와의 관계에서 탄생하였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속 주인공이 사랑하는 마리안네를 보면 괴테가 약혼했던 '릴리 쇤만'이 떠오른다. 그 밖에도 다양한 소설과 시 속에서 과거 연인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괴테의 여자들은 그녀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피카소가 정열적인 육체적 사랑을 캔버스에서 강렬하게 그려나갔다면 괴테는 정신적인 사랑을 소설 속에서 섬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의 경험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바이마르 공국에서 추밀관- 고위 행정관료 -으로 일하던 괴테는 상관인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편지로 아우구스트의 허락을 받았으며 공작은 괴테의 여행을 유급휴가 처리해 준다 -. 이탈리아에 있던 2년 동안 괴테는 자신의 명성을 숨기기 위해 가명을 썼으며 마치 학생이 된 양 예술과 고전 문화를 직접 체험했다. 이 기간 동안의 값진 경험은 괴테의 미학과 예술관을 변화시켰고 그가 내면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훗날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편지 형식의 작품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파우스트》만큼 괴테의 경험, 더 나아가 그의 인생과 철학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3개월 만에 단숨에 써 내려간 《베르테르》와 달리, 《파우스트》는 약 6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확장된 작품으로 괴테가 죽기 직전까지 손을 댄 작품이다. 이 대작은 《베르테르》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괴테의 모든 것이 집대성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에서는 괴테의 학문적인 부분, 사랑, 행정가로서의 경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고민이 녹아들어 있다. 어찌 보면 괴테의 인생 자체를 압축해 놓은 듯하다.
경험이 글로 재창조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는 괴테와 결을 같이 한다. 피타고라스와 함께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인물답게 대부분이 추정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개인적인 경험,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의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선두주자 격인 《햄릿》은 어린 아들 '햄넷'의 죽음을 모티브로 탄생했으며 《맥베스》는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렸던 시대의 혼란 속에 자신이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쓰였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을 했고 채무문제로 법정까지 섰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유대인을 바라보는 당시의 삐뚤어진 시선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진 복합적인 인물로 보이며, 《리어왕》은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과 당시 사회적 혼란이 반영된 작품이다. 이렇듯 셰익스피어의 허구는 대개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괴테도 경험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창조하였다. 그의 소설 속에서 주관적인 체험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으로 승화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괴테는 어떻게 개인적인 경험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그다지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경험들은 어떻게 위대한 문학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위대한 변모의 배경에는 괴테의 문학적 천재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일상의 경험들을 문학적으로 재창조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는 우리가 따라 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하지만 꼭 대문호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괴테의 삶에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은 있다. 우리의 무기가 되어줄 만한 요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괴테의 삶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경험의 질과 양이다. 괴테의 경험은 강렬했다. 섬세한 감수성과 냉철한 사고가 어우러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들이 괴테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곱씹어보는 시선.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이다. 괴테의 경험은 다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폭넓은 경험의 중심에는 그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열정은 괴테에게 끊임없는 연애 경험을 주었고 신분 상승의 의지는 그에게 행정가로서 최상위 계층과 함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지적 갈망은 방대한 독서와 어우러지며 지식, 다시 말해 창의적인 사고를 위한 재료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생각의 재료를 잘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잘 쉬었다. 괴테는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여행을 떠났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스위스, 프랑스, 체코,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을 한 번, 또는 여러 번 여행하였다. 괴테의 여행은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괴테를 형성하는 과정이었으며 생각의 재료들이 연결되는 계기였다. 자연을 사랑하기도 했다. 괴테는 식물학, 광물학 등에 관심이 있었고 대저택에 정원을 가꾸며 산책하고 사색했다. 이 같은 양질의 휴식은 괴테에게 생각의 재료들이 연결되는 짜릿한 순간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괴테보다 한 세기 늦게 태어난 또 다른 천재도 잘 쉰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다방면의 지식을 양질의 휴식을 통해 연결해 나갔다. 그에게 휴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다음 꼭지에서는 그 과학자를 다뤄보겠다. 그는 무의식마저 활용한 천재, 앙리 푸앵카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