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다고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등장하기 반 세기 전, 그에 비견되는, 어쩌면 - 당대에 미친 영향력 면에서는 - 그를 능가하는 천재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그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개인이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다 -, 탄탄한 과학 지식을 갖춘 지도자였다. 본업에서도 뛰어났다. 백성을 위한 정치의 3요소라고 하는 인권, 경제, 의료 분야에서 모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다. 여진족을 정벌하여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국경선을 만들고 신라 위주의 편협한 역사 기록을 바로 잡은 것도 바로 그였다. 권력에 대한 이해도 상당했는데 특유의 정치력으로 신하들을 존중하면서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해 나갔다. 사실상 조선의 거의 모든 제도는 그의 재위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이후 21명의 왕들이 한 일은 그저 그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유지보수한 것이 전부라고 할 정도이다. 서양철학에 플라톤이 있었다면 조선정치에는 그가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태종 이방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왕위에 오르기 어려웠지만 큰 형인 양녕대군의 비행과 기회를 잘 살린 세종의 영리함이 어우러지며 그는 조선의 4대 임금이 된다. 정치 초반에는 태종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 만큼 세종의 정치는 사실상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점인 세종 4년부터 시작된다. 그 후 30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그는 향후 500년간 지속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는 개인적인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모르는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그의 지식은 해당 분야에 정통한 신하를 한참 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대개 일을 주도적으로 해 나갈 수 있었고 아랫사람에게 맡기더라도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세종은 과학, 역사, 지리, 법학, 농사, 의학, 언어,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는데 사실상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런 면은 다빈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무언가를 발표하는데 게을렀던 다빈치에 비해 세종은 반드시 결과물을 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예술가와 정치가라는 직업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세종이 세상에 내놓은 것들 중 가장 많은 것이 책이다. 그의 저서는 대개 백성의 생활에 실용적이거나 그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을 다루었는데, 책의 목록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다양한 일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다. 그는 《농사직설》에서 우리나라 토양과 기후에 맞는 작법을 소개함으로써 백성들이 수확량을 늘리는데 기여하였고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로 의료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고려사》를 통해 삐뚤어진 역사관을 바로 잡았다. 그 밖에도《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오례》, 《세종실록악보》 등도 남겼다. 하지만 세종의 책들 중 정수는 역시 《훈민정음》이다. 일부에서는 세종은 큰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고 실제로 한글을 만든 건 집현전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세종이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고 집현전은 해설서 정도를 썼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글은 인문, 사회, 철학, 과학 등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 문화산물이기에 인위적으로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소리에 대한 이해까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세종은 한글을 만들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10학- 유학, 무학, 이학, 역학, 음양풍수학, 의학, 자학, 율학, 산학, 약학 -을 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실제 자신이 이 모든 것에 정통하였다. 심지어 음감도 뛰어나 당대 최고 음악가 중 하나인 박연의 시연 때 미세한 소리를 지적했다는 일화가 세종실록에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역량은 표음 문자인 한글을 만들 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글은 세종의 다재다능함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며 이제는 우리나라를 넘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 정확하게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세계가 인정하는 문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책만 쓴 건 아니다. 이천, 이순지, 정인지 등과 함께 과학을 연구하였으며 장영실을 시켜 몇 가지 의미 있는 발명품을 세상에 내놓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해시계인 양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 낮과 밤 모두 시간을 알 수 있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세종은 특히 천문이나 역법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의 옛 수학 서적을 독학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고 한다.
정치가로서의 세종도 뛰어났다. 그는 왕권과 신권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필요한 정책들을 관철시켜 나갔다. 그는 신하들과 토론을 벌이기를 즐겼으며 필요하다면 설문조사- 지금으로 치면 국민투표에 가깝다 -를 통해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까지 하였다. 세종은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노비, 특히 여자 노비에 대한 처우를 다수 개선하었는데 이중 출산 휴가제도가 가장 눈에 띈다. 당시 노비에게 주어지는 산후 휴가는 겨우 1주일이었다. 세종은 이를 100일로 대폭 늘린다. 그것도 모자라 4년 후에는 산전에도 1개월을 쉬게 해 주었으며 그로부터 4년 뒤에는 남편까지 1개월 휴가를 준다. 불과 십수 년 전의 대한민국보다도 나아 보이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또한 노비를 죽이거나 재산을 빼앗는 주인을 엄중히 처벌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선은 노비도 살만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비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삼불거를 강조하며 칠거지악을 핑계로 부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도 어렵게 하였다. 당시 조선은 7가지 사유에 해당하면 아내를 버릴 수 있었는데 세종은 삼불거, 즉 시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치르거나 아내와 함께 한 후 부귀를 얻었거나 이혼 후 여자가 갈 곳이 없는 경우는 아내를 내쫓을 수 없게 하였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당시 노인의 기준인 70세 이상의 노비에게는 노역을 면제하였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궁으로 초대하여 임금- 여자는 중전 -이 직접 연회를 베푸는 양로연을 주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인권에 대한 관심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세종은 신분, 출신, 국적 등에 관계없이 오로지 능력만 보고 사람을 썼다. 덕분에 서얼 출신인 황희가 수십 년 동안 그를 보좌할 수 있었고 관노비였던 장영실이 과학기술에 공헌할 수 있었다. 세종시대에는 심지어 여진이나 위그루 출신이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여자노비를 의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임금은 재주를 가진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고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재주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의 너그러움은 그런 것이었다.
외교에도 능했다. 명나라에 사대를 하면서도 얻을 것은 얻어냈다. 심지어 명에게 자국 백성인 여진족 정벌의 허가를 받아내 현재 북한의 국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노략질로 백성을 힘들게 했던 왜구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며 평화를 유지하였다. 대장경 사본과 짐승 가죽으로 그들을 달래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군대를 보내 경각심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내부 정치도 잘했다. 세종은 신하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였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은 강하게 추진하며 왕의 힘을 보여주었다. 간단히 말해 세종은 사람을 잘 다뤘다.
세종의 다재다능함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으로 봐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처럼 방대한 분야에서 이토록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책은 세종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전시키고 확장해 나갔다. 우리가 모방할 수 있고 따라 해야 하는 것은 세종의 천부적인 재능이 아닌 후천적인 노력일 것이다.
대왕의 독서에 대한 일화는 꽤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대군시절의 이야기이다. 아버지 태종은 학문에 전념하는 아들이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건강이 염려가 될 정도로 하루종일 책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세종의 방에 있는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다. 그런데 우연히 《구소수간》이라는 책이 하나 남게 되었는데 어린 세종은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세종의 독서욕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는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책을 읽었으며 외국에 가는 사신에게는 평소 읽고 싶었던 희귀본을 구해오라고도 하였다. 하루는 평소처럼 밤늦게까지 책을 읽던 세종이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다. 알아보니 신숙주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임금은 기뻐하며 자신도 다시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한참이 지난 후 집현전에 불이 꺼졌고 세종이 가서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세종은 자신의 옷을 그의 등에 덮어주었다고 한다. 신숙주도 당대 손꼽히는 독서광이었다고 하는데 세종은 더했으니 책에 대한 그의 열망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경연이라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경연은 임금과 신하가 한데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인데 세종은 이를 자신과 신하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경연에서는 다방면의 책들이 다루어졌는데 《율려신서》라는 중국의 악서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경연에서 음악 관련 서적을 읽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똑똑한 임금과 함께 하는 경연은 신하들에게는 무척 힘든 일이었겠지만 분명 조선을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세종에게는 책에서 읽은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세종의 다재다능함은 역사상 단 두 명에게만 허락된 '대왕'이라는 칭호를 그에게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과로로 인한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평생 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었고 죽기 며칠 전까지도 정사를 관장했다고 한다. 대왕의 위대한 업적은 천부적인 능력과 치열한 노력이 어우러지며 탄생했던 것이다. 운 좋은 조선은 다재다능한 임금 덕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세종을 보면서 어쩌면 단 한 사람의 다재다능함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