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독한 열정,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by 날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타고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얼마나 대단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조각가였고 스스로를 조각가로 여겼지만 회화나 건축에서도 정점에 오른 거인이었다. 불과 이십 대의 나이에 조각한 《피에타상》은 조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다비드상》과 《모세상》도 인체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조각에서만이 아니다. 교황의 지시로 마지못해 작업을 했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나 《최후의 심판》에서 보여준 거장의 표현력은 화려했던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정점에 서있다. 그 시대의 굵직굵직한 화가들 상당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모사하며 성장했으며, 어찌 보면 당대에 미친 영향력 측면에서는 라이벌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앞선다고도 볼 수 있다. 건축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는데, 훗날 바로크 시대에 우후죽순처럼 지어지는 돔의 모델이 된 성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그다- 초기 설계는 다빈치의 친구이자 미켈란젤로의 숙적 브라만테가 하였다 -. 이렇듯 조각, 회화, 건축에서 보여준 미켈란젤로의 다재다능함은 르네상스인의 표본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위대한 업적은 물론 미켈란젤로의 압도적인 천재성에 기인하겠지만, 그가 지독할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미켈란젤로는 타고난 조각가였다. 망치와 정을 들고 커다란 대리석을 쪼갤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먼지와 소음, 그리고 반복되는 충격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근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며 꾸부정한 자세로 장시간 일해야 하는 조각가의 숙명도 그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리석은 만만치 않은 재료였다. 비교적 무르지만 깨지기 쉬워 대리석을 조각할 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재능을 뽐낼 기회였다. 만약 원하는 만큼 대리석을 확보할 수 있었고 후원자들에게 방해- 그를 거쳐간 4명의 교황을 비롯한 권력자들로 인해 평생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 했다 -를 받지 않았다면 더 많은 조각 작품을 남겼을 그였다.


회화에서도 그는 어려운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일을 맡기에 그는 너무 뛰어났고 높은 위상만큼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적이 많은 데는 그의 꼬장꼬장한 성품도 한몫했을 것이다 -. 특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교황을 꼬드겨 작업을 맡겼다는 음로론이 돌 정도였다. 우선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천장의 넓이는 500m²를 넘었고 그림에 들어가는 인물만 300명 이상이었다. 작업 환경도 녹록지 않았다.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곳은 천장이었다. 게다가 프레스코 기법-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하는 방법 -을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얼굴에 떨어지는 회반죽을 맞아가며 비정상적인 자세로 특수 비계- 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에 매달려 수년간을 보내야 했다. 신체적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심했다. 교황의 독촉, 유력자들의 간섭은 그의 성미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피렌체 출신의 열정적인 조각가는 이 무시무시한 작업을 단 4년 만에 끝낸다. 그나마 교황이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조수들이 모두 떠나며 늦춰진 것이 그랬다. 새로 온 조수들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거의 혼자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열정적이었고 열정이 이끄는 대로 몰입했다. 작업하는 내내 장화를 벗지 않아 장화의 내피가 피부에 붙어 장화를 벗을 때 살점이 같이 뜯겨 나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세계적인 미술사가 곰브리치 교수가 표현한 대로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한 개인이 그만한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화가가 아닌 조각가였다는 점이다. 스포츠에 빗대면 마이클 조던이 야구로 전향해서 오타니만큼의 성적을 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은 마이너리그를 전전했다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 작품 중 하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타고난 천재성과 지독한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어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죽을 뻔하기도 했다. 6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로는 또 다른 어마어마한 작품을 의뢰받는다- 의뢰자가 교황 클레멘스 7세인 것을 감안할 때 의뢰보다는 지시에 가깝다 -. 천장화는 아니었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는 구조에 3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며 그림의 높이가 십 미터를 넘는 대작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비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작업을 이어나가던 미켈란젤로는 결국 떨어지고야 말았다. 아마 머리부터 떨어졌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작품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최후의 심판》을 보란 듯이 완성하였다. 그리고 아흔이 다 되는 나이까지 살며 죽기 이틀 전까지 피에타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참 지독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보통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작업을 해나갈 수 있었을까? 무엇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열정을 사그라들지 않게 만들었을까? 이토록 지독한 노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피카소만큼이나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마이클 조던만큼이나 승부욕에 불탔으며 미야자키 하야오만큼이나 완벽주의자였다. 이 세 가지 요인이 그의 천재성에 기름을 부으며 열정의 불꽃은 평생 동안 꺼지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피카소가 수많은 연애를 통해 여체를 탐닉하며 이를 캔버스에 그려나간 데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신의 형상을 닮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특히 젊은 남성의 이상적인 신체를 -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인체는 완벽해야 했고 이상적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다가가야 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 또는 화가가 느끼는 그대로 - 인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던 피카소의 창의성과는 대조적인 접근이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한 또 다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는 못생기다 못해 추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메디치 가문의 정원에서 같이 수학하던 토리지아노라는 학생과의 다툼으로 코가 심하게 휘기까지 하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자신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던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더 집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각을 통해 대리석 속에 갇힌 아름다움을 해방시켜 나갔다- 조각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정의이다 -. 이는 그에게 숭고한 사명이었고 그가 신에게 다가가는 방식이었다.


경쟁심도 한몫했다. 그는 용감하게도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스무 살 많은 선배 다빈치와 공공장소에서 언쟁을 벌였는데, 이날 다빈치로부터 들은 조롱을 잊지 않고 평생 그에게 경쟁심을 드러낸다. 미켈란젤로는 한 번 받은 모욕을 반드시 되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마이클 조던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 천재의 경쟁관계를 악용한 시의회는 베키오 궁전- 피렌체 시청 -의 서로 다른 면의 벽화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각각 맡긴다-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배정받았다 -.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둘 다 그림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이기려고 열정을 불태우며 보다 완벽한 표현을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경험이 훗날 그가 남기게 되는 위대한 작품들의 자양분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경쟁 상대는 레오나르도만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 브라만테 등 당대 뛰어난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승부욕을 불태웠고 이기고자 하는 강력한 동인은 그를 열정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은 완벽주의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을 할 때 새로 고용한 보조 화가들의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자 모두 해고하고 혼자서 전부 다시 그린다. 프레스코화를 그릴 때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회반죽을 덧칠한 후 전부 다시 그렸다고 한다.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하는 일도 마지않았다. 아마 그는 당대에 두 번째로 시체를 많이 해부한 사람일 것이다- 첫 번째는 다빈치라고 생각한다 -. 이렇듯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그에게 대충은 없었고 완벽을 향한 열정은 그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피에타상에서 성모가 입은 옷의 주름이나 다비드상에서 보여준 손과 혈관의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표현, 그 밖에 거장의 작품 속 모서리의 비중이 작은 인물에서도 우리는 완벽을 향한 미켈란젤로의 의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여러모로 참 경이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다음 꼭지에서 자신의 결점을 무기 삼아 시대의 아이콘이 된 여성을 다뤄보겠다. 그녀는 바로 여성복 시장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딴 기업을 이끌어 간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다.

keyword
이전 10화세상을 바꾼 반골기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