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은 완벽한가? 완벽주의자들이 빚어내는 눈부신 성과를 생각하면 그런 것도 같지만 빗나간 완벽주의에 무너져가는 엘리트들을 볼 때면 자신이 없어진다. 완벽주의자들의 목표는 탄탈로스의 사과이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다. 간혹 손 끝이 닿을라 하면 그들은 의심을 한다. 목표가 너무 낮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목표를 높인다. 이쯤 되면 성공을 거부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실패가 이어지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패배의 경험이 쌓여가며 그들은 무언가를 시작하기 어렵게 된다. 쉽게 우울증에 빠지며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압박을 이겨낼 만큼 마음이 단단하고, 지난한 노력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열정이 대단하며,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겸허하다면 완벽주의만큼 압도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동력은 거의 없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완벽함은 이룰 수 없을지 모르지만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탁월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는 천재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중에서도 선두에 서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게임 체인저'이다. 그는 단순히 뛰어난 애니메이션 감독을 넘어,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이나 즐기는 오락물에서 모든 세대가 감동할 수 있는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싸구려 휴머니즘- 그의 표현이다 -을 바탕으로 한 단순하고 헐거운 스토리라인에서 벗어나, 삶의 철학과 사색이 담긴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인 세계관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탁월함은 환경, 생명, 전쟁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섬세한 화면을 통해 느끼게 하는 능력이다. 보수적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자기 주도적이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인 경우가 많으며 이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특히 그가 1941년에 보수적인 국가에서 태어난 보수적인 남성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접근은 놀랍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수작업으로도 유명한데 디즈니, 픽사 등을 중심으로 디지털 제작이 일반화되던 시기에 끝까지 손으로 그린 그림을 강조하며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만화가를 꿈꾸던 일본의 한 청년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완벽주의는 미야자키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노노케 히메》를 제작할 때는 주인공인 '아사타카'가 사슴 '야쿠르'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 장면을 수십 번 수정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보통의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법한 것이었다. "중력과 감정이 어울려야 한다!" 결국 제작 일정은 3개월 지연되었고 스태프들은 그 기간 동안 하야오에게 시달려야 했다.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나무 묘사에 집착하였는데 잎사귀 하나하나의 위치와 농도까지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 토토로가 사는 거대한 참나무는 지브리의 상징이 되었지만 배경을 담당했던 애니메이터는 작업이 끝난 후 탈진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달리기 장면에도 집착하였는데 얼마나 깊게 연구를 했는지 '달리기'를 주제로 애니메이터들에게 강의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가 말했다. "아이들에겐 달리려는 의사는 없습니다. 빨리 가려는 의식이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하야오의 디테일이다.
그는 작은 부분에 집착하면서도 애니메이션 제작 전 과정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모습은 흡사 스티브 잡스를 보는 듯하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스토리보드(콘티)의 주요 컷만 그리고 나머지는 팀에 맡기는 것과는 달리 하야오는 콘티 전부를 직접 한 컷 한 컷 그린다. 분량은 보통 수백 장에 달하며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1,400장이 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하루에 수차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접 작화 상태를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수정할 것을 지시한다고 한다. 심지어 직원들의 식단, 책상 정리, 일정, 작업실 습도까지 체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 피곤한 상사가 아닐 수 없다.
바꾸기도 자주 바꾼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제작할 때는 작화가 거의 끝난 상태에서 이야기 구조를 전부 바꿨다고 하며, 《바람이 분다》에서는 절반 이상을 녹음한 상태에서 성우를 교체하기도 하였는데 경험이 없었던 《에반게리온》 감독을 성우로 데뷔시키며 그가 원하던 '기계공 같은 건조한 감성'을 구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야자키의 관심은 오직 작품의 완성도에 있었다. 일정이 지연되고 제작비가 늘어나고 변경으로 인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일론 머스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테슬라 '로드스터'를 출시할 때 미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출시 직전까지 끊임없이 수정사항을 내놓았다. 완벽함 앞에 그들은 이기적이었고 비효율적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완벽주의자의 전형이다. 디테일에 집착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며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위해서는 다른 것들은 기꺼이 희생한다. 하지만 그는 완벽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반 세기가 넘어가도록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시작도 못하고 우울해하는 잘못된 완벽주의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일까? 그는 어떻게 대단한 성과에도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이들과 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완벽하기를 바랐지만 정작 그 자신이 완벽해지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은 영원한 미숙련 노동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의 자서전 격인 출발점-과 반환점-에는 창작에 대한 미야자키의 생각과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발표한 에세이, 강연, 인터뷰, 대담, 기획서 등이 혼재되어 있는 이 책에서 미야자키는 대개 까칠하고 비판적이지만 오만해 보이는 그의 발언들을 헤집고 들어가면 겸손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에게 겸허함은 예뻐 보이는 가식적인 말들이 아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부정하지 않으며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독특한 작업방식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콘티를 그려가며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준비에 준비를 더하며 결국 시작도 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심지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제작 사정상 콘티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였다. 덕분에 스태프들은 작품의 결말도 모른 채 - 미야자키도 몰랐을 것이다 - 매일매일 바뀌어 가는 콘티와 설정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작품은 시작되었고 지브리를 대표하는 완성도 있는 애니메이션이 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작업하면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의 완벽주의는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희생이 뒤따랐다. 그와 함께 한 동료들은 엄청난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모노노케 히메》가 발표된 이후에는 회사의 직원 대부분이 퇴사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이에 더해 모든 작업을 통제하려고 하는 미야자키의 스타일이 직원들의 성장을 막는다는 시선도 있다. 그의 지위 하에서 동료들은 주도적으로 일을 하기가 어려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하야오가 마땅한 후계자를 만들지 못하고 수차례 은퇴를 번복하며 현장에 복귀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희생자는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인정하듯 아이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결국 애니메이터였던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은 모순적이다. 일본- 의 폭력적인 역사 -을 싫어하지만 가장 일본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지만 정작 본인은 영상보다 책을 좋아하며, 전쟁을 증오하지만 전투기 마니아다. 심지어 그는 전쟁으로 부를 거머쥔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완벽주의도 미야자키의 아이러니와 닮아 있다. 작품은 완벽하기를 바라지만 그 작품을 만드는 자신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실패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묵묵하게 완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살아가는 거야." 어쩌면 그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은 완벽하지만은 않은 완벽주의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