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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Oct 29. 2024

부탁의 귀재,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의 역작 《종의 기원》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책일 것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은 수천 년 간 이어오던 종교의 위상에 도전장을 던졌고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중들은 혐오와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단 한 권의 책으로 그는 스타가 되었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가장 많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과학자가 되었다. 당시 다윈을 원숭이로 풍자한 캐리커처들은 매일 쏟아져 나왔고 아이들의 이름을 다윈으로 짓기도 하였으며 그의 집은 여행자들에게 성지순례의 코스처럼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되었다.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한 부자는 다윈에게 적지 않은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엄청난 업적에 비해 다윈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자서전에서 밝혔듯 그의 두뇌는 남다르지 않았다 - "나는 이해력이나 기지에 있어서 그리 민첩하지 못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지는 추상적인 사고를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내 기억력은 광범위하지만 흐릿하다" -. 병약하기도 했다. 다윈이 유전이라고 믿었던 위장병은 평생 그를 힘들게 했다. 과로를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지없이 속이 안 좋아 몇 달씩 아무것도 못하고 자리에 눕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의 체질을 닮은 - 다윈은 그렇게 생각했다 - 자녀들이 아플 때마다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특별할 것 없는 지능에 몸도 허약했던 다윈은 어떻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걸까?



          다윈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데에는 유복한 환경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은 부유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더 부유한 집안과 결혼했으니 당연했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의사라서 부유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데 의사를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돈을 잘 벌었다. 진찰료는 그의 수입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그가 운영하는 사설 자금 중개업- 지금으로 치면 은행에 가깝다 -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대부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으로 도로와 항만에 투자하였다. 그리고 투자로 번 돈으로 땅을 사들였다. 다윈과 그의 가족이 살던 슈루즈베리 땅의 4분의 3이 아버지 것이었다니 그의 사업수완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술 더 떠 다윈의 처가- 다윈이 외사촌과 결혼했기에 외가이기도 하다 -는 전국구 부자였다. 그의 처조부는 영국의 도자기 브랜드인 '웨지우드'를 만든 그 웨지우드였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부를 끌어모으는 기업가들 중 선두주자였다. 그래서 다윈은 시간이 많았다. 변변한 직업 없이도 평생 좋아하는 연구를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의 업적을 폄하하기는 어렵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영국 빅토리아 사회에서는 다윈과 같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없지 않았다. 직업이 여가인, 다시 말해 '어떻게 잘 놀지'가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다윈과 같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윈처럼 잘 놀지 못했다. 



          그는 가진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살던 대저택의 정원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놀이터였고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나서부터는 그에게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 주었다. 그는 자신만의 정원을 다양한 생물로 채워가며 연구의 기반으로 삼았다. 다윈에게 초인적인 두뇌가 없었다고 해서 과학자로서의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모으기를 좋아했고 동물과 식물을 끈기 있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직업- 당시에는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에는 그 무엇보다 필요한 특성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으며 참신한 아이디어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다윈의 엄청난 업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기가 하나 있었다. 그는 부탁의 귀재였다.



          다윈은 당시 '신사계급'이라고 불리던 상류층이었다. 다시 말해 태어나면서부터 훌륭한 인맥을 갖추었다는 의미였다. 다윈은 주어진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고 뻔뻔할 정도로 잘 활용했다. 그는 5살 터울의 형의 소개로 만난 듯한 헨슬로라는 교수로 인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그의 추천으로 비글호에 탑승하게 되며 진화론의 불씨를 짚힌다.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다윈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그의 이론이 공격을 받을 때는 다윈의 불독 '헉슬리'가 대신 싸워줬고 그 외에도 후커, 라이엘, 아사 그레이 등 다윈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계적인 석학인 그들이 다윈을 대변해 주었다. 덕분에 다윈은 자칫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었던 이론을 발표했지만 부와 명성을 누리며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종교의 권위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했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등이 모두 어려움 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윈은 누가 봐도 무리한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는 집안의 하인들에게 정원을 관리하고 식물을 채집하게 했으며 - 다윈과 마찬가지로 - 변변한 직업이 없는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그의 연구를 돕게 했다. 그의 딸 헨리에타는 주로 그의 원고를 읽고 교정하였고 식물학자로 성장한 아들 프랜시스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학자 친구들도 거리낌 없이 부려먹었다. 자신의 책을 추천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고 곤란한 일을 대신해 달라고도 했다. 심지어 국가 소유의 귀중한 표본을 빌려 달라고까지 하였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상대방이 답신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레를 먼저 보냈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다윈의 자신감이 보이는 대목이다. 다윈이 주변만 괴롭힌 것은 아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 물어보고 표본을 빌려달라고 했으며 동식물을 대신 관찰해 달라고도 했다. 신기한 것은 다윈의 무리한 요구에도 상대방은 다윈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윈에게 호감을 갖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는 점이다.



          다윈의 장기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위기에 처했을 때 빛을 발한다. 1858년 다윈은 윌리스에게 작은 소포를 하나 받는다. 윌리스는 일 년 전쯤 그가 가금류 가죽을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었다. 소포에는 논문이 하나 동봉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다윈이 십수 년 전에 초안을 썼던, 훗날 《종의 기원》이 될 자신의 연구와 거의 유사했다. 심지어 그의 글은 다윈의 것보다 더 뛰어났다. 외지에서 수집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윌리스가 자신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윈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정말 그 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다윈은 친구 라이엘에게 편지를 쓴다. 내용은 이랬다. 다윈의 또 다른 친구 후커와 상의해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달라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라이엘은 후커와 이야기해서 기가 막힌 해결책을 마련한다 - 어디까지나 다윈의 입장에서 이지 윌리스에게는 아니다 -. 후커가 회원으로 있는 린네학회에서 다윈과 윌리스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최근 모임이 취소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후커는 다윈의 논문을 발표하는 일정을 그 사이 끼워 넣는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윌리스의 원고는 바로 발표를 해도 될 정도로 완성도 있었지만 다윈의 것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전에 쓴 초고를 발췌해서 발표를 위한 글을 다시 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윈은 성홍열에 걸린 막내아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결국 다윈이 대충 짜깁기한 원고를 후커의 아내가 고쳐야 했다. 그렇게 다윈이 없는 학회가 열렸다. 그리고 친구들은 다윈이 우선권을 주장하기에 유리한 증거들- 1842년 다윈이 작성한 초고와 그 글을 읽어봤다는 후커의 증언, 또 다른 친구 아사 그레이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발표 앞쪽에 끼워 넣었다.    



          이러한 과정은 누가 봐도 불공정해 보인다. 사실 윌리스는 자신의 논문을 라이엘에게 전달해 달라고 다윈에게 보냈다. 신분이 낮은 데다 인맥과 명성이 부족했던 그는 다윈에게 부탁해 자신의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다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다윈과 그의 친구들 -은 그에게 알리지 않고 윌리스의 논문을 자신의 원고와 함께 학회에서 발표해 버린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그에게 알려야 했다. 윌리스의 반응에 따라서는 다윈이 쌓아온 신사로서의 이미지와 명성이 한방에 날아가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또 한 번 다윈의 무기가 등장한다. 그는 후커에게 윌리스에게 편지를 한 통 써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자신이 써 놓은 편지와 함께 윌리스에게 보낸다. 다행히 윌리스는 겸손하고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사회적 위치를 감안했을 때 이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는 다윈에게 오히려 자신의 논문을 발표해 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낸다. 윈은 이렇게 인생 최대의 위기를 넘어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아무런 대가 없이 다윈을 도와주었던 걸까? 다윈에게 그 정도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면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다윈은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매력은 가식이 없고 정직한 그의 품성에서부터 시작됐다. 윌리스의 논문을 처리하는 과정은 자칫 권력자들이 힘없는 사람의 공을 가로챈 걸로 비친다. 일부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윈이 오래전에 연구를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 또한 거짓은 아니다. 더군다나 다윈은 윌리스로부터 편지가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출판을 서두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우선권을 포기하려는 의사를 라이엘에게 밝히기까지 했다. 



          나는 다윈이 거짓으로 보여주기식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진지하게 이론에 대한 우선권을 포기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다윈은 존경받을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 특유의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특정인과의 마찰을 되도록 피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그리 잘생기지 않은 외모에도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는 진리를 향한 다윈의 열정이었을 것 같다. 다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했고 진심으로 자연의 섭리를 알고 싶어 했다. 이처럼 강렬하면서도 순수한 열정은 때론 사람들을 움직인다. 아무런 대가 없이도 도와주고 싶게 만든다. 성격은 달랐지만 이 부분만은 스티브 잡스와 통하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잡스의 열정에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한 트럼펫 뮤지션은 전혀 관심이 없는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들어주고 아이튠즈에 저작권을 제공하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지요. 잠시 후 저는 컴퓨터가 아닌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윈이 쓴 편지는 1만 4천여 통에 달한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이 그렇고 없어진 것도 그 정도의 양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다윈은 평생 수많은 편지를 써가며 사람들을 자신의 숭고한 프로젝트에 끌어들였다. 그때마다 편지의 수신인들은 기꺼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들이 도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윈이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소심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필요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부탁할 수 있었다. 이런 적극성에 개인적인 매력이 더해지며 요청을 받은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다윈을 도왔던 것이다. 그렇게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한 개인이 아닌 다윈을 필두로 한 집단의 결과물이 되었다. 이것이 평범한 다윈은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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