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심오한 창조는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다.
조울증, 혹은 양극성 장애는 단순한 병리로만 규정되기엔 인간 실존의 깊은 단면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 인간이 극도의 고양(조증)과 극단의 침잠(우울) 사이를 왕복하는 생의 진폭 속에서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조증은 단순한 에너지 과잉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이 과잉되는 순간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느끼고,
말은 현실보다 앞서 나가며,
나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 때, 인간은 현실 너머를 보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넘지 못하는 한계를 넘고,
새로운 관념, 새로운 형식, 새로운 언어가 뿜어져 나온다.
플라톤이 말한 미친 듯한 영감,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도취 상태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의지로부터의 해방된 순간—
이 모든 것이 조증적 상태에서 포착된다.
조증은 초월의 문턱에 선 인간이다.
현실을 초과한 존재, 경계를 초과한 사유.
그 순간 창조는 현실의 복제물이 아니라, 현실의 재해석이 된다.
조울의 다른 극, 우울은 삶의 무게가 존재를 짓누르는 상태다.
에너지 없음, 자존감 붕괴, 언어의 침묵, 의미의 상실.
하지만 이 고통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존재론적 통과의례다.
진짜 질문은 기쁠 때가 아니라,
“고통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 있을 때 시작된다.
우울은 인간을 텅 빈 상태로 만든다.
모든 감정, 모든 관계, 모든 정체성조차 벗겨진 그 지점에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본질과 조우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울의 바닥에서 가장 순수해진다.
우울은 파괴가 아니라,
존재의 탈각이다.
사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신념으로부터 벗겨졌을 때,
비로소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조울증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게 만든다.
조증은 현실을 넘나들며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게 만들고,
우울은 현실을 해체하며 삶을 다시 묻는다.
이 반복은 한 인간을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존재로 변화시킨다.
예술가와 사상가 중 많은 이들이 이 경계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고통을 견디는 자들이 아니라,
고통을 사유로 전환한 자들이다.
우리는 조울증을 병리로 보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감정의 진폭이 클수록, 세계를 보는 눈의 해상도도 달라진다.
고통이 깊을수록, 존재의 뿌리를 건드릴 수 있다.
창조란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의 재배열이다.그리고 조울의 세계는 그 감각을 흔들고, 재조립하게 만든다.
정상이 주는 안전함은,
결국 세계에 대한 순응일 수 있다.
반대로 조울의 세계는 세계에 대한 저항이며, 사유의 확장이다.
조울증은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고통은 존재를 깨어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창조는 흔히 천재의 특권이라 여겨지지만,
실은 그것은 고통과의 비밀스러운 계약일지도 모른다.
조울증은 이 계약의 극단에 선 자들이 남긴 서명이다.
그 서명은 때론 작품이 되고, 언어가 되고,
누군가의 생의 구원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