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철학적 통찰

by 신성규

히치콕의 말, “모든 사람은 노출증 환자이거나 관음증 환자다”는 단순한 심리 진단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보임’과 ‘봄’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사유되고 구성되는지를 드러내는 철학적 명제다. 처음에는 유머처럼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 말은 인간 존재의 이중적 욕망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들키고’ 싶어 한다. 자신의 고통, 고백, 비밀, 나르시즘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란다. 그것이 노출증이다. 동시에 인간은 타인의 숨겨진 세계를 엿보고 싶어 한다. SNS, 연예인 스캔들, 몰래카메라, 리얼리티 쇼—모두 이 관음증적 충동의 현대적 표현이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타인의 은밀함을 원한다.

히치콕은 이 두 가지 충동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본다. 카메라는 ‘보는 자’이고, 스크린의 인물은 ‘보여지는 자’다. 하지만 그 구도는 언제나 뒤집힌다. 관객은 누군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


노출증은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확인이다. “나는 여기 있어. 날 좀 봐줘.”라는 절박한 존재의 외침이다. 반면 관음증은 ‘타인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지만, 실은 그를 통해 나 자신을 안전하게 느끼고, 판단하고, 때로는 위로받는 방식이다. 우리는 남의 인생을 훔쳐보며 자신의 통제를 확인한다.


이 구조는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판옵티콘 개념으로 이어진다.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중심에 서 있고 피감시자는 그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만, 반대로 감시자가 실제로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구조는 감시의 내면화를 낳는다. 즉,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SNS는 이 구조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며, 동시에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요된 감시’가 아니라 ‘자기-노출의 욕망’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히치콕의 이 말은 실존의 불안과 관계적 정체성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한다. 항상 타자의 시선을 상상하고, 그 시선 안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그래서 히치콕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감시 카메라이자 피사체이며, 자기 인생의 감독인 동시에 구경꾼이다.


그러나 이 모든 ‘봄’과 ‘보임’의 뒤편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 놓여 있다. 정말 내가 존재하고 있는가? 라캉은 이를 ‘응시(le regard)’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대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그 대상이 나를 바라본다고 느낀다. 응시는 ‘객관적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을 외부에서 확인하려는 존재의 균열이자 불완전성이다. 라캉은 이 응시의 순간이 욕망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나는 내가 본 것을 통해서, 나의 욕망을 구성하고, 내가 어떻게 ‘보여질지’를 상상하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간다.


결국 인간은 항상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정립하려는 존재이며, 이는 히치콕의 영화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는 본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보여진다. 고로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타자의 시선 없이도 구성할 수 있는 힘’이다. 노출도 관음도 아닌, 자기 응시의 고요한 권력. 그 힘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팔아넘기며 타인의 거울 속에 갇힌 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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