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정신의 분기점이 있다. 독일은 이성의 중심이 되었고, 프랑스는 예술과 감성의 중심이 되었다. 이성과 감성—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두 기질이 아니라, 두 문명의 사유방식이자 언어의 구조, 법의 기초, 삶을 대하는 태도의 전적으로 다른 흐름이다.
프랑스어는 유려하다. 선율이 있다. 말을 미끄러지게 만든다. 동사 변화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섬세하게 구분되며, 형용사와 부사의 위치는 문장 전체의 리듬을 고려한다. 프랑스어는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이는 프랑스 예술, 문학, 그리고 감각 중심의 철학에 그대로 이어진다. 몽테뉴, 루소, 들뢰즈, 바티유—그들은 느끼는 인간을 먼저 다루었다.
반면 독일어는 묵직하다. 문장은 길고, 동사는 끝에 온다.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다. 이는 곧 독일어가 사유의 완결성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헤겔의 변증법, 칸트의 선험적 종합 판단, 하이데거의 존재론—그 모두는 명료함이 아니라, 논리와 깊이를 견디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 독일은 생각하는 언어다.
이 언어적 기반 위에 법과 질서의 차이가 더해진다. 프랑스는 대륙법의 전형이다. 혁명 이후 법은 인간의 감정을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은 정서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질서였다. 프랑스의 법은 ‘행동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틀이다.
반면 독일의 법은 질서 자체의 미학이다. 독일의 법철학은 헤겔을 거쳐 칼 슈미트에 이르기까지, 권위와 구조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려 했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체계 안에서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철학과 예술의 분화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 철학은 종종 문학이 되었고, 문학은 정치가 되었으며, 정치가 다시 예술이 되었다. 프랑스 사유는 스스로를 경계 짓지 않는다. 들뢰즈와 푸코는 철학이 예술이 되길 바랐고, 보들레르와 랭보는 시가 혁명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독일 철학은 경건하다. 추상화의 절정이다. 칸트는 인간 이성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탐구했고, 쇼펜하우어는 고통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절제된 문장으로 서술했다. 예술조차 철학의 하위 범주로 삼으려 한 이 기질은, 고전음악과 미니멀리즘, 그리고 철저한 기획 속에서 완성되는 독일식 미학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성과 감성의 차이는, 사유를 어떤 방식으로 견디는가에 대한 차이이기도 하다. 독일은 ‘끝까지 생각하는’ 민족이고, 프랑스는 ‘끝까지 느끼는’ 민족이다. 둘 다 인간 정신의 정점에 있지만, 하나는 중심으로 침잠하고, 다른 하나는 경계로 확산된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 속에서 살아간다. 지나치게 독일적이면 인간은 기계가 되고, 지나치게 프랑스적이면 인간은 환상이 된다. 그러나 이 이성과 감성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철학을 쓰고, 예술을 느끼며, 제도 속에서 자유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