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구약은 율법을 중심에 두고 있었고,
신약은 그 율법을 완성하거나 혹은 급진적으로 뒤집는다.
구약은 명령하고, 신약은 사랑한다.
구약은 “지켜라”라 말하고, 신약은 “용서하라”를 외친다.
그리고 이 전환의 중심에는 한 인물이 있다.
예수,
그의 등장은 계획된 예언의 성취이자,
어떤 의미에선 시대 구조를 깨는 변칙적 개입이었다.
우리는 그를 메시아로 부르지만,
그의 등장은 율법의 틀 속에선 모순이고 반역이었다.
예수의 존재는 말한다.
“진리는 완성될 수 없다. 진리는, 오직 뒤집힘을 통해 갱신된다.”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진리가 시대마다 어떤 방식으로 발화되고, 달라지고, 충돌하는가를 보여주는 역사다.
성경조차, 진리의 시간성을 증언한다.
신은 동일하지만,
그 신의 언어는 모세와 예수에게 다르게 들린다.
이는 진리란 시대의 귀에 따라 다른 울림을 가진다는 점을 은유한다.
어쩌면 신조차도,
인간의 시간성과 집단 감각 안에서만 번역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만약 진리가 변한다면,
그것은 절대적 실체의 붕괴가 아니라
우리 인류의 집단 지성이
그 진리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형성하고 있다는 증거다.
진리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진리는 누군가의 내면에 계시처럼 발생하고,
그 파장이 점차 퍼지며
사회 전체의 정서와 제도를 바꾼다.
이것이 바로 예수 이후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변화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흐름이 지금도 반복된다 —
이번에는 예술의 형태로.
아방가르드는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존의 진리가 낡았다는 불편함을 먼저 일깨운다.
기하학을 해체하고,
인물을 찢어놓고,
구문을 분해하고,
감정을 탈색한 채로 내던진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진리의 “현재적 효력”에 대한 질문이다.
예술은 언제나 진리의 전초부대다.
말보다 먼저,
정치보다 먼저,
느낌이 먼저 변한다.
느낌이 변해야,
사람들이 진리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진리보다 앞서 간다.
예언자는 광인이었고,
예수는 신성모독자였고,
피카소는 기괴했고,
뒤샹은 변기를 전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이 시대를 가장 먼저 변형시킨 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대중은 늦게 온다.
그러나 결국 따라온다.
느낌은 나중에 언어가 되고,
언어는 제도와 윤리가 된다.
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생성되어, 퍼지고, 충돌하며, 결국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항상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진리는 자신을 뒤집는 자에게서 다시 태어나며,
그 새로운 진리는 초기에는 늘 비정상, 기이함, 미친 것으로 불린다.
그리고 언젠가,
그 비정상이 새로운 정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