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
누군가는 계산에 밝고, 누군가는 감정의 결을 읽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모든 이에게 ‘수익모델’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자본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할 때, 표현은 설명으로, 감정은 상품으로 바뀐다.
모든 이가 돈을 좇는다면, 이 세계엔 음악도, 그림도, 문장도 남지 않는다.
돈은 잘 버는 사람이 벌고, 예술은 잘하는 사람이 전업해야 한다.
예술은 효율과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반복, 실패, 정지, 비생산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자본의 시간은 즉각성과 회수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점점 더 ‘브랜딩된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예술가는 표현으로 세상을 탐험하는 존재다.
그 탐험은 수익과 무관하게 계속된다.
그러나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은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예술가가 배고파야 한다는 말은 낭만적 허상이다.
오히려 그들이 굶지 않아야 탐험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다.
그렇게 환경을 주면, 예술을 하지 않을 거라고?
천만에. 예술가는 돈이 많아도 불만족하는 존재다.
그들의 진짜 욕망은 명확하다 — 더 깊이 사유하고, 더 멀리 도달하고, 더 정교하게 감정을 조율하는 것.
예술가가 모든 걸 잘하려 하면, 결국 자기 본령에서 멀어진다.
먹고살기 위해 마케팅을 공부하고, 세무를 걱정하는 순간,
예술은 뒷줄로 밀려난다.
자본은 욕망을 사용한다.
그러나 예술은 자본보다 더 오래된 욕망에 뿌리내려 있다.
그 욕망은 “소유하고 싶다”가 아니라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이다.
말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싶은 갈증.
그것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예술가는 부자가 되어도 여전히 표현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내면의 결핍과 넘침을 동시에 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자본의 동력일 수 있지만,
표현은 자본을 초월하는 내면의 리듬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표현을 위해선 물리적 조건이 필요하다.
책을 찍으려면 인쇄비가, 공연을 하려면 무대가,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이 필요하다.
예술은 자율을 갈망하면서도, 구조적으로 경제에 의존한다.
이 딜레마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에게 “브랜딩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표현의 내용보다 생존의 포장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만든다.
결국 필요한 건,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제3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단순히 후원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예술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다.
예술가는 욕심쟁이다.
그들은 돈보다 더 깊은 만족을 원하고,
인정보다 더 먼 진실을 쫓으며,
안정보다 표현의 불확실성을 더 사랑한다.
그 욕심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의 작품 앞에서 울고, 멈추고,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