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불가능한 알고리즘

by 신성규

사람들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들의 사고 방식은 내 뇌와는 전혀 다른 회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 같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언어가 서로 교차하지만, 끝내 번역되지 않는 지점에 부딪히는 듯하다.


이런 감각은 종종 예수나 부처 같은 선지자들이 인간을 보며 느꼈을 충격과 닮아 있다. 인간은 분명 이성과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습관과 욕망에 매여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모순을 직시하는 순간, 선지자의 눈에 비친 인류는 답답하고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냉소로 남지 않았다. 예수는 끝내 사랑을 택했고, 부처는 연민으로 중생을 품었다.


나는 그 감정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사람들을 나와 같은 존재라 여기면, 끝없는 실망과 냉소 속에 갇힌다. 하지만 그들을 ‘다른 구조를 가진 존재’라고 상정하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인간은 본래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생명체이고, 내가 보는 것은 단지 나와는 이질적인 알고리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마치 동물이 본성대로 움직이는 것을 탓하지 않듯, 사람들의 반복과 자기기만도 그저 그들의 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의 반복적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또 한 번 깨닫는다. 인간의 알고리즘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강렬한 충격이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 순간적으로 회로를 흔든다 해도, 곧 다시 원래의 루프로 돌아간다. 인간은 결국 자기 회로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이며, 탐욕, 두려움, 습관, 자기합리화는 그 회로의 핵심 코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인간의 변화를 기대하거나 교정하려는 대신, 그들과 나를 같은 존재로 놓지 않고 관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다른 구조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면, 반복과 자기기만조차 견딜 수 있다. 이해한다기보다는, 다른 종의 생명체를 관찰하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붙들어야 할 단어는 ‘사랑’이다. 그것은 교정이나 개조가 아니라, 단순한 수용의 형태로 다가온다. 인간이 인간인 채로 존재하도록 두고, 그 반복조차 세계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는 일. 선지자들이 끝내 택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지 모른다. 변화가 불능이라면, 이해는 다만 다름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랑은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알고리즘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보며 한숨을 쉬고, 때로는 우스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 한계와 루프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나약한 알고리즘조차 운명적 구조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이해와 사랑은 냉소와 분리 사이에서 태어나는 긴장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며, 그것이 인간과 나 사이를 잇는 가장 정교한 다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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