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결코 추상적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한 철학자의 사유는 그의 개인적 기질, 그가 겪은 시대의 굴곡,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피어난다. 스피노자의 고독한 체념은 네덜란드 종교 갈등의 그림자에서, 마르크스의 급진적 비판은 산업혁명의 굉음 속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전쟁과 점령의 유럽에서 탄생했다.
철학자는 언제나 사회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사회의 천박함, 모순, 억압을 날카롭게 감지한다. 그래서 철학은 늘 사회를 향한 비판의 칼날처럼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자는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사회가 없었다면, 즉 사유를 촉발할 충돌과 상처, 부조리가 없었다면, 그의 철학 역시 꽃필 수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는 사회를 혐오해야만 한다. 그것이 철학적 문제의식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사회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 혐오와 불편함이야말로 사유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사회와 모순적 관계를 맺는다. 사회는 철학의 대상이자 적대이면서, 동시에 철학의 토양이자 은인이다. 철학자는 그 토양의 부패를 견디며, 그 속에서 새로운 씨앗을 틔운다.
철학은 바로 이 모순 위에서만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