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인간됨

by 신성규

항우울제를 끊은 지 다섯 달째. 몸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사소한 일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작은 상처에도 쉽게 흔들린다. 고통은 더 선명하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마치 감각이 다시 살아난 듯,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하게 된다.


약을 복용할 때의 삶은 안전했다. 깊은 절망이 닿지 않는 대신, 깊은 기쁨도 닿지 않았다. 감정의 파도는 차단되어 있었고, 나는 평온이라는 이름의 무채색 바다에 떠 있었다. 그 평온은 나를 지켜주었지만, 동시에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고통이 사라진 세계는 감각이 무뎌진 세계였고, 그곳에서 나는 점차 ‘살아있다’는 느낌을 잃어갔다.


이제 나는 다시 흔들린다. 슬픔에 쉽게 젖고,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고이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집어삼킨다. 하지만 그 순간들 속에서 분명히 느낀다. 이 고통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인간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사실 고통 없이는 인간도 없다. 고통은 감각의 어둠이 아니라, 감수성의 문이다.


감수성이란 단순히 예민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내가 다시 맞닿았다는 증거다. 웃음도, 눈물도, 두려움도, 설렘도 모두 다시 내 피부를 스친다. 항우울제가 지워버렸던 미세한 진동들이 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면서도, 동시에 감사한다. 무감각 속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인간답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고 보았다. 니체는 인간이 고통을 통해 강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느낀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도 만들지만, 무엇보다 나를 ‘살아 있는 자’로 만든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절망이 없다면 환희도 없다. 우리가 인간인 이유는 바로 그 모순된 두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불안정하다. 때로는 이 흔들림이 다시 나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확신한다. 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더 진실하게 인간으로 살아간다. 고통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의 감수성을 다시 깨우는 스승이다.


나는 이제 무채색의 평온보다는, 불안과 눈물이 섞인 진짜 삶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 불완전한 흔들림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을 만나고, 인간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감수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통이 돌아왔기에, 나는 인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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