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닮는다는 것에 대하여

by 신성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모순 중 하나는, 부모를 닮아버린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심지어 평생 부정하려 애쓴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거울 속의 표정이나 말투, 혹은 무의식적인 선택 속에서 부모의 흔적이 튀어나온다. 유전자가 우리의 몸을 규정한다면, 생활 환경은 우리의 정신을 빚어낸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부모로부터 흘러들어온 강물과 같다.


그렇기에 자식에게 부모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원형이며 동시에 과제다. 나라는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절반은 부모의 흔적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각인을 그대로 두면, 나는 단지 부모의 반복일 뿐이다. 인생의 본질적 미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닮아버린 나를 자각하고, 그 닮음을 넘어서는 것.


이 과정은 단순히 반항이나 단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청소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나는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라는 선언은 아직 미숙한 형태다. 왜냐하면 부모를 부정하는 순간조차, 우리는 부모의 기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극복은 부정이 아니라, 승화에 가깝다. 즉, 부모에게서 받은 원형을 자기 삶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 마치 낡은 건물의 벽돌을 다시 쌓아 올려 전혀 다른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부모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일종의 무력감을 느낀다. “나는 결국 그들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가?”라는 절망감이 찾아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순간이야말로 자기 주체성이 싹트는 시작점이다. 왜냐하면 닮음을 인정해야만, 그 닮음을 변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의 뿌리를 지우려 할수록, 오히려 그 뿌리에 얽매인다. 반대로 뿌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위에 자신만의 가지와 꽃을 피울 수 있다.


부모를 극복한다는 것은 결국 부모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 뒤, 그 흔적을 통해 나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부모의 성격적 단점조차도 나를 단련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부모의 분노를 닮았다면, 나는 그 분노를 창조적 에너지로 변형시킬 수 있다. 부모의 두려움을 닮았다면, 그 두려움을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바꿀 수 있다. 결국 극복은 대립이 아니라 재구성이다.


이렇듯 인생은 주어진 것과 선택한 것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부모로부터 주어진 나와, 내가 선택하여 빚어내는 나 사이의 끝없는 협상. 이 과정은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 나이가 들수록, 특히 부모가 노쇠해지거나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이 협상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안에서 반향처럼 울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알게 된다. 부모를 넘어서는 일은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임을.


결국 인간의 숙명은 닮음과 극복이라는 두 축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부모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동시에 그 얼굴을 조금씩 바꾸어 간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 역시 우리를 닮아버릴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닮음과 극복은 단순한 개인의 과제가 아니라,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간사의 리듬이라는 것을.


부모를 닮는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그 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우리의 선택이다. 주어진 것 위에 자신만의 문장을 덧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부여받은 가장 본질적인 과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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