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하루의 끝자락, 불 꺼진 방 안에서 불현듯 몰려오는 그 공허함은 마치 차가운 물이 발끝부터 몸 전체를 덮쳐오는 것과도 같다. 그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진다. 어떤 이는 술잔을 기울이고, 또 어떤 이는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를 뒤적인다. 그러나 가장 흔히 떠올리는 선택은 이성이다. ‘누군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외로움이 가장 짙을 때일수록 이성을 만나면 안 된다.
외로움은 판단력을 흐린다. 그것은 투명한 렌즈 위에 끼는 습기와도 같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자신이 갈망하는 상(像)을 덧씌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과 관계를 맺는다. 상대의 존재는 단순히 ‘내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가, 없는가’의 잣대로만 평가된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처음부터 불균형하다. 한쪽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사실 자기 안의 공허함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상대가 내 기대에 맞추어 영원히 나를 달래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실망이 찾아오고, 그 실망은 분노나 냉소로 변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짙어진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피하려는 만남이 결국 더 깊은 외로움으로 귀결되는 아이러니. 이 순환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사람을 찾으라는 신호가 아니라, 잠시 멈추라는 신호일지 모른다. 고독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가장 선명히 마주할 수 있다. 외로울 때 홀로 머무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불편한 감정들을 차근차근 해체한다. 그것은 혼자 걷는 산책과 같고, 홀로 마시는 커피와 같으며, 나 자신에게 쓰는 편지와도 같다. 이 과정이 지나야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서게 된다.
온전히 선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내가 공허하지 않을 때, 상대의 존재는 결핍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우주로 다가온다. 그때 관계는 의존이 아닌 교류가 된다. 외로움이 만든 환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바뀐다.
외로움을 무조건 없애야 할 감정으로 여기는 사회는 우리를 오도한다. 오히려 외로움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정직한 감각 중 하나다. 그것은 “너는 아직 네 자신을 다 마주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외로움은 불행의 징조가 아니라, 성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인간이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존재라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은 관계의 동력이자 동시에 그 관계를 왜곡시키는 위험 요소다. 그렇기에 외로움과의 균형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성숙을 배우는 일과 같다.
그러니 외로울 때는 성급히 누군가를 찾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의 충동은 달콤하지만, 결코 진실한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움 속에 머물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보고,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자격을 얻는다.
외로울 때 이성을 찾는 것은 마치 갈증에 눈먼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순간은 채워지지만, 결국 더 큰 갈증을 불러올 뿐이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 자신을 단단히 세운 사람은, 샘물처럼 맑은 관계를 만날 수 있다. 외로움은 적이 아니라, 스승이다. 그 고통스러운 교훈을 견디는 자만이 진짜 만남의 자리에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