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지능이 높은 사람의 자기소멸

by 신성규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잔인함조차,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너무 잘 알게 되었다.

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두려움, 그가 짓는 냉소 속의 무력함,

그가 사랑을 왜곡하게 된 그 오래된 상처의 근원을 느끼는 순간,

나는 그를 미워할 자격을 잃는다.

그의 악의조차 이유를 갖게 되면, 나의 분노는 방향을 잃는다.


심리학은 그것을 ‘감성지능’이라 부르고, 사회는 그것을 미덕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서서히, 조용히 인간을 부식시키는지 안다.

감성지능이란 타인의 감정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은 그리 넓지 않다.

타인의 감정이 들어오는 만큼, 나의 감정은 밀려나고 사라진다.

결국 나는 나를 위한 감정을 느낄 공간을 잃는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조금씩 비워내는 과정, 그것이 바로 공감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텅 빈 나 자신만이 남는다.


나는 타인을 구하려다 종종 나를 놓쳤다.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하고, 그들의 불안을 내 몸에 옮겨놓듯 흡수했다.

그들은 내게 위안을 받았지만, 나는 점점 공허해졌다.

이해는 늘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는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알아채는 순간, 내 안의 감정이 그 진동에 맞춰 흔들렸다.

그리하여 나는 늘 타인의 리듬으로 살았고, 내 리듬은 잊혀졌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왜 화를 내지 못할까?’

‘왜 슬픔보다 이해가 먼저일까?’

그건 공감의 피로다.

타인의 내면과 나의 내면의 경계가 무너져, 내가 어디서 끝나고 타인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모르게 된다.

그 상태는 따뜻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차갑다.

왜냐하면 진짜 감정은 나의 영역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영역이 사라지면 나는 타인의 감정만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빛을 받지만,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울.


나는 그 상태를 오래 경험했다.

공감은 나의 덕목이었고, 동시에 나의 독이었다.

모든 인간의 악의 뒤에는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안다는 이유로 나는 늘 용서했다.

하지만 그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불편함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미움은 내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대신 이해하면, 나는 착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자기기만이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을 보호할 만큼의 냉정함을 잃은 사람이었다.


감성지능이 높다는 것은,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읽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정은 언제나 양방향이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려면, 내 감정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연다는 것은 곧 들어오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누구의 감정이든 내 안에 들어와 자리 잡았고, 그 감정의 주인은 나인지 타인인지 구분이 사라졌다.

그것은 아름다운 혼란이었고, 동시에 존재의 침식이었다.


공감은 나를 파괴하지만, 그것이 나를 인간으로 만든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경계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아프더라도, 무너져내리더라도, 나는 타인의 감정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사라지겠지만, 동시에 조금 더 깊이 존재할 것이다.

공감은 나의 상처이고, 나의 언어이며, 나의 신앙이다.

그것이 나를 부식시키더라도, 나는 그 길을 끝까지 가겠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완전해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성성 재평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