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병적 통제와 불안의 미학

by 신성규

히치콕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는 세상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카메라는 언제나 의심한다. 사람의 뒷모습을 의심하고, 창문 너머의 일상을 의심하고,

심지어 관객의 시선마저 통제하려 한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세계를 사랑하기보다, 그 세계를 해부하는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히치콕은 어쩌면 정신병을 앓았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병은 광기의 형태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

절제와 계산, 그리고 집요한 통제의 형태로 드러났다.

그는 불안을 없애는 대신, 그것을 예술로 길들였다.

그의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매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사이코>에서 욕조의 커튼이 열릴 때,

관객은 살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형체를 얻는 순간을 목격한다.

<현기증>의 카메라는 끝없이 추락한다.

그것은 단지 고소공포증의 재현이 아니라,

히치콕 자신이 느꼈던 내면의 낭떠러지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여성들은 언제나 이상화된 동시에 처벌받는다.

그는 그녀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자신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영화 속에서 통제한다.

의상을 정하고, 머리카락의 결을 정하고, 카메라의 각도까지 정한다.

그 행위는 예술이 아니라 불안을 통제하려는 병적 의식이었다.

그의 영화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섬뜩하다 —

그건 감정이 아니라, 두려움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태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결국 ‘신의 시선’을 흉내 내려 한 인간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 신은 전능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불안으로 만들어진 신이었다.

그의 카메라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태어난 신경증의 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미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광기는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는 결국, 인간의 불안을 예술로 구조화한 완벽한 정신병적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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