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평균을 향해 수렴한다.
그건 생존의 법칙이자 인간 두뇌의 본능적 절약이다.
깊이 사고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고통을 낳고, 불안을 불러온다.
그러나 불안은 집단 생존에 불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사유의 깊이를 억제하고, 감각의 표면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 안정의 언어가 바로 대중문화다.
역사 속 대중문화는 단 한 번도 인간의 인식 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그것은 기존 질서 위에서 변주되었을 뿐이다.
고대의 서사시가 신을 찬미했다면, 현대의 팝송은 욕망을 찬미한다.
둘 다 인간의 평균적 감정 — 두려움과 욕망 — 위에서 작동한다.
결국 대중문화는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문명의 순환이다.
대중문화의 발전이란 사실상 감각의 정교화를 의미한다.
영상은 더 화려해지고, 음향은 더 섬세해졌으며, 이야기는 더 쉽게 감정선을 자극한다.
그러나 감각의 정교화는 반드시 사유의 단축을 동반한다.
그건 신경학적 진실이다.
인간의 인지 구조는 집중과 몰입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즉각적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래서 현대의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생리학적이다.
사람들은 사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 반응을 소비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인간의 뇌 구조 안에서 이미 그 한계를 결정지어진다.
대중문화는 인간 인식의 평균값을 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민주화’가 가지는 비극적 역설이다.
예술이 모두에게 열릴수록, 그 예술은 누구에게도 깊지 않게 된다.
그러나 진화는 언제나 불편함에서 시작됐다.
편안함 속에서는 새로운 문명이 태어난 적이 없다.
철학, 혁명, 예술, 과학 — 이 모든 근원은 불편함과 의심,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제거한다.
불안을 지워주고, 의심을 줄여주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만들어준다.
그 부드러운 세계 속에서 문명은 잠든다.
나는 대중문화의 미래를 묻기 전에, 인간이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유는 고통을 필요로 하고, 고통은 평균을 거부한다.
그 거부가 사라진 곳에서 문명은 안정되지만, 그 안정은 곧 정체의 다른 이름이다.
문명의 속도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우리는 기술의 속도만이 가속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의식은 여전히 평균에 머물고, 감각은 그 위를 질주한다.
그 불균형이 현대 문명의 피로감을 만든다.
대중문화는 그 피로를 달래는 완벽한 진통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모든 진통제는 결국 약효가 떨어진다.
그때, 인간은 다시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문명을 다음 단계로 이끄는 불씨다.
대중문화의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그 한계 너머의 예술 — 다시 사유를 불러오는 예술 — 이 태어날 것이다.
대중문화는 인간의 평균적 감각을 가장 완벽하게 반영한 결과물이다.
그것은 문명의 거울이지만, 동시에 문명의 천장이다.
그 천장을 뚫기 위해선 기술이 아니라, 인식의 구조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즉, 인간이 다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불안해하고, 다시 고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불편함의 회복 없이는, 어떠한 발전도, 어떠한 진화도 오지 않는다.
문명은 결국 편안함이 아니라 불편함을 감내하는 능력으로 진보한다.
대중문화의 시대는 그 능력을 잃은 시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진짜 예술가는 감각을 마취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감각의 마취를 깨뜨리는 사람이어야 한다.